6·25전쟁은 나라가 망할 뻔한 어쩌면, 불쌍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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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나라가 망할 뻔한 어쩌면, 불쌍한 전쟁이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6.23 09:16
  • 호수 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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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8화 | 정한규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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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사단 66연대 소속, 남해 출신 군인 109명 근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에도 군 생활 이어가
병사로 입대해 하사관 지원, 상사로 전역
지난 10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정한규 6·25 참전 유공자가 21사단 66전우회기 앞에서 깃발에 관한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 깃발은 정한규 유공자가 기증한 것이다.
지난 10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정한규 6·25 참전 유공자가 21사단 66전우회기 앞에서 깃발에 관한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 깃발은 정한규 유공자가 기증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고, 2년 뒤 입대 영장이 내게 날아왔다. 전시 상황이라 어차피 가야 되는 군대였고, 기왕 가야 하는 거 하사관이 되고 싶었다. 정한규(鄭韓圭·91) 6·25 참전 유공자의 작은 바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최전방을 누비며 전쟁이 끝나도 군 생활을 이어가며 훗날 상사로 명예롭게 전역했다. 
 
누구나 그랬듯, 가난한 형편
부모님 도와 어업에 뛰어들어

 정한규 유공자는 1932년 8월 10일 이동면 초양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는 토박이 중 토박이로, 정금조·임순애 부부 슬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첫째·둘째 누나와 셋째·넷째 형을 둔 귀한 아들이었다. 
 1940년 그가 9세가 되던 해 이동초등학교(당시 이동공립심상소학교로 추측)에 입학했고, 25회 졸업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8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당시에는 10세에도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 유공자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일본어와 일본글만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한글은 조금만 배웠고, 그래서인지 재미가 없었다"며 "또, 공습경보가 울리고 학교에서 돼지를 키워 구경하고 돌봤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어린 시절 낙이라면 공차기. 당시에는 축구공이 없어 짚을 감아서 공을 만들었다고 한다.
 194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이후 중·고등학교는 입학하지 못했다. 그것이 한으로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정 유공자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작은 어선을 운영했고, 정 유공자는 형들과 봄과 가을에는 강진만에서 낙지와 전어, 꼬막을 채취하며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정 유공자는 "낚시 줄을 500개 정도 물에다가 넣고 하루만 지나봐, 하루에 200~300마리씩 막 잡았지"라고 회상했다.
 

21사단 66전우회기의 이야기가 6·25&월남전 흔적남기기 사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21사단 66전우회기의 이야기가 6·25&월남전 흔적남기기 사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죽고 살고는 하늘의 뜻
 1951년 12월 정 유공자가 20세가 되던 해 중매를 통해 아내 신영순(서면 연죽마을 출신) 씨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이후 1년 뒤 1952년 8월 18일 전쟁 통에 입대 영장을 받게 된 정 유공자. 결혼생활 동안 정 유공자의 부부는 7남매를 낳게 되는데,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딸이고, 다섯째는 아들, 여섯째는 딸, 일곱째는 아들이다.
 참고로, 그 이전에 정 유공자의 형 2명은 이미 6·25전쟁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집안의 아들들이 전부 전쟁터에 나가게 된 셈이다.
 정 유공자는 "당시 초양마을에서는 5명이 훈련소로 향했는데, 2명은 돈이 많았던 건지 친인척 중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던 건지 몰라도 편한 곳으로 빠졌지 아마, 그 2명에 나는 포함이 안 됐지"라고 말했다. 입대를 명받은 상황에서 이유야 어쨌든 훈련소로 향하기 위해 포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배정 받은 곳은 3연대 74중대, 그곳에서 96일 훈련을 받았다. 이전부터 정 유공자는 서두에 설명한 바와 같이 어차피 해야 할 군 생활이라면 일반 병사보다는 간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나은 훈련병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정 유공자는 "당시 어린 나이에 형들도 전쟁에 참여했고, 죽고 살고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며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걸 알아봐 줬나봐. 훈련병에서 하사관학교로 입학하게 됐지"라고 설명했다.
 군번은 9232414. 훈련병 때나 하사관학교에서나 군번은 같았다.
 하사관학교에서도 성실히 훈련에 임한 결과, 정 유공자의 자대는 21사단 66연대(현 66여단) 2대대 본부중대 보급하사직을 맡게 됐다. 쉽게 말해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배분하는 역할이었다. 작전지역은 동부전선 최전방 강원도 고성군, 그 이름도 유명한 향로봉(금강산·국사봉·설악산·오대산으로 연속되는 태백산맥 북부에 위치)이었다. 
 특히 66연대장은 남해군 출신 안만일 대령이었고, 군의관도 남해군 출신 김갑규 대위였다. 당시 66연대 내에는 남해군 출신 군인이 109명으로 추정된다. 
 정 유공자는 "안만일 연대장이 남해사람들 각별히 챙겨줬지. 남해사람들이 많아서 어려운 군 생활이었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그게 전우애 아니겠는가?"라고 물었다. 당시에도 남해사람들의 끈끈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 "다행히, 최전방이라 그런지 우리 중대는 방어와 경계만이 계속된 임무였다"고 회상했다. 실제 전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유공자의 기억에 따르면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방어와 경계를 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휴전협정 후 계속된 군 생활
전역 후 남해로 귀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에도 정 유공자는 군 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중사였던 정 유공자는 제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상관들은 그가 남길 바랐던 것이다. 
 이후 1956년 강원도 원주시 소재 창설예비사단인 38사단 직할대 박격포중대로 자리를 옮겼고 보급하사의 역할은 계속해서 맡았다. 
 정 유공자는 "보급품들을 받아와도 분실하기 일쑤였다. 제대한 군인들이 훈련을 받으러 왔는데, 나라가 정말 힘들 때니까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갖고 갔다"며 "그러면 사비로 사라진 물품들을 채워넣어야 하는데 그것 또한 고통이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재미없는 군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정 유공자는 수도사단으로 전출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요청은 받아들여져 1956년 수도사단의 부사단장 수행병으로 차출됐다. 몇 년간의 군 생활을 이어가며 마침내 1959년 9월 1일자로 상사로 진급했다.
 그러나, 전쟁을 겪고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정 유공자는 1960년 12월 20일 전역하고, 남해로 돌아와서 농사도 지어보고 어업도 해보고 민간인 생활에 젖어 들어갔다. 1968년에는 호남정유 공장이 여수시에 건설될 때 파이프를 자르고 제작하는 일을 1년 6개월 동안 맡았고, 나중에는 여천공단에서 배관 총반장도 맡아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6·25참전유공자 남해군지회 부지회장을 맡아 보훈을 알리고 있는 정 유공자는 "6·25전쟁은 참 불쌍한 전쟁"이라며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가 못 먹고, 못 살고, 망할 뻔한 전쟁이었지. 지금 나라가 이렇게 사는 게 기적이지"라고 강조했다.
 전역 후 60년 넘는 세월 동안 많은 기억을 잊었지만, 확실한 건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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