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을 맞고 보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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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을 맞고 보내는 마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7.08 16:38
  • 호수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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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145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포화에 한반도가 찢기고 부서진 날  
내 나라 살리려고 몸을 던진 충혼인데
이 산하 호국보훈은 어디쯤에 왔는가    
 
 이 글은 7월에 발표되겠지만 호국 보훈의 달에 쓰는 글이다. 이 마을 노인회 회장님과 총무, 필자는 이 마을 동갑내기 삼총사로 불린다. 세 사람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관련 있는 행사에 적극 참가하고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계신 곳도 찾아가서 참배하기로 하였다. 
 6월 1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솟대 세 쌍을 세웠고 6월 4일 호국보훈의 달 기념 걷기대회에 참가하였으며 6월 7일에는 역시 세 사람이 홍천 축야산문화공원에 갔다. 
 김덕원 의사의 기미독립운동사를 높이 찬양하여 만든 공원인데 엄청난 규모로 잘 꾸며져 있었다. 잘 가꿔 놓은 나무 사이로 애국지사들의 시와 유명 문인들이 애국지사를 찬양한 시비가 엄청나게 많이 세워져 있어 민족정기를 살리는 공원임을 실감케 했다. 광개토대왕비나 발해 석등의 재현은 아주 훌륭하였다. 
 오늘은 잊지 못할 동족상잔의 비극 전쟁 6.25가 터진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횡성 참전 기념 공원에 가보기로 하였다. 횡성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제4차 공세 때 횡성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얼마 전 세계일보가 보도한 횡성 전투의 일부분을 상기해 본다.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싸움 중 하나인 횡성전투는 1951년 2월 11일 중공군과 북한군이 일제히 횡성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공세에 가담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총 13만 5천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한국군 8사단은 이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심각한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8사단 후방에 있던 미 육군 10군단도 중공군 포위망 안에 갇힐 처지가 됐다. 무너진 8사단 장병들이 허겁지겁 후퇴하면서 미군 등 유엔군도 퇴각이 불가피해졌다. 유엔군 일원으로 미군 지휘를 받던 네덜란드군 대대가 간신히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미군은 차량 등 장비와 화포 등 무기를 버리고 황급히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지휘관인 마리누스 덴 오우덴을 포함한 122명이 전사하고 3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횡성 참전 기념 공원의 상황판은 적고 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네덜란드는 총 4748명의 군인과 해군 구축함을 파병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대한민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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