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처음 하는 일은 숨을 내쉬는 것…먼저 줄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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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처음 하는 일은 숨을 내쉬는 것…먼저 줄 수 있어야"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7.21 09:18
  • 호수 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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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1화 김봉두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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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탄이었을까, 포탄이었을까
말을 듣지 않는 팔
김봉두 6·25 참전 유공자와 지난 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부상당한 팔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김봉두 6·25 참전 유공자와 지난 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부상당한 팔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꽤나 선명한 어린 날의 기억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고, 6·25전쟁 참전 이후 그는 인간과 삶의 본질을 찾기 시작했고,  후에는 천리교에 마음을 정착하게 만들었다. 김봉두(金 捀斗·91) 6·25 참전 유공자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김봉두 유공자는 창선면 수산마을에서 김성규·윤영업 부부 슬하의 7남매 중 형 2명과 누나 1명 그리고 본인, 남동생 2명과 여동생 1명을 두고 있다. 그도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돌을 넘겨야 출생신고를 하는 풍습에 맞춰 1년 늦게 신고를 마쳤다. 주민등록상 나이는 91세이지만 원래는 92세이다. 그는 생년월일을 음력 1931년 12월 27일로 기억하고 있다.
 
유년시절, 일제강점기 생활기
 김 유공자의 인생 첫 장면은 7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유공자의 할아버지인 김수현 수산마을 이장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큰집에서 아침식사 전에 먹을 갈고 붓에 먹을 묻혀 할아버지가 한자를 썼던 장면이다. 특히, 먹을 잘 갈아놓으면 할아버지는 선반에 있던 떡을 김 유공자에게 선물로 줬던 나름 행복한 추억이다.
 김 유공자의 형들과 누나는 당시 대부분이 그러했듯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고, 창선면사무소 서기들이나 순사들이 각 가정을 돌며 곡식을 걷어갔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한다.
 김 유공자는 "그때 먹을 게 정말 귀했어요. 당시 창선에는 저수 시설도 없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도 하나 제대로 못 심었답니다"라며 "나무 풀뿌리 캐서 먹고, 해초 뜯어 먹고 그랬었지요"라고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창선면에는 예부터 어업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창선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김 유공자는 "조선어를 일주일에 2시간씩 배웠었는데, 2~3학년 때에는 조선어 배우는 시간이 없어졌어요"라고 기억했다.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남해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또, 하교 이후에는 불이 잘 붙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를 뜻하는 `솔갱`으로 기름을 내기 바빴다고 한다. 김 유공자는 "학교 마치고 나면요, 솥단지 안에 솔갱을 넣고, 톱이고 도끼고 나무 떼러 갔죠. 기름을 많이 떼면 마을에서 상품도 줬지요"라고 설명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거치며,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을 끝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김 유공자는 13세이던 6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김 유공자는 "어렸으니 해방이 뭔지도 모르고, 학교에는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올라가대요? 그리고 교감 선생님이 우리들 보고 이제는 `하이!` 이렇게 답하지 말고 `네`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라며 "그래서 6학년 2학기 때부터 한글을 배운 기억이 나네요"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유한 가정만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 해방 이후 초등학교 졸업을 할 때 창선중학교가 개교하려던 참이었다. 정원은 150명. 당시 창선중학교가 처음 문을 연다고 하니 4~5살 많은 청년들도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유공자는 "중학교를 짓는데 기금이 모자라서 시설도 안 돼 있고, 선생님도 부족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찬조금을 받으라고 시켰지요. 50원, 10원, 20원. 찬조금은 학교 운영에 쓴 걸로 기억합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려웠던 중학교 시절을 거쳐 창선중학교 1회 졸업생이 된 그는 안타깝게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70년이 지나도 선명히 남아있는 그날의 흉터와 수술자국이다.
70년이 지나도 선명히 남아있는 그날의 흉터와 수술자국이다.

최전방 파주에서 파편 맞아
 6·25전쟁이 한창이던 김 유공자가 21세 때 입대 영장이 날아들었다. 그는 "온 나라가 전쟁 때문에 난리인데, 차라리 잘됐다 싶더라고요. 또, 일본군대가 아니라 한국군대니까 의무적으로 가야했죠"라며 "신체검사를 마치고 해병대로 차출됐어요. 그렇게 해병대 19기가 됐답니다"라고 입대상황을 설명했다. 군번은 9224082이다.
 전시가 급한 상황, 진해 경화동의 해군 훈련소에서 보통 훈련 기간보다 짧게 훈련을 받고 바로 전장에 투입된다. 당시, 진해해군병원에 죽은 장병들의 시체를 보기 위해 많은 장병의 부모들이 북새통을 이뤘던 장면이 스쳐간다. 
 훈련을 마치고 그가 자대배치 받은 곳은 최전방이자 임진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이었다. 지금은 민간인출입통제선(DMZ)이 위치한 곳이다. 
 김 유공자는 "당시 장단면에는 빈집이 많아서 군인들이 배가 고파 사과밭의 사과를 따먹었죠. 먹을 것을 구하러 가다가 지뢰를 밟아서 죽고…"라고 말을 아꼈다.
 공격을 위한 고지나 들판, 어느 곳이든 인민군들은 해병대가 보이면 포탄을 쏘기 일쑤였다. 그나마 산에는 파인 호가 있고 은신할 수 있는 나무와 잎들이 많아 나은데, 들판에는 은신할 곳이 없기 때문에 철모를 삽처럼 땅을 파서 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라산 탈환작전
 최전방 전투에 참여한 만큼, 김 유공자도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입대한 지 1년쯤 됐을까?
 야밤에 도라산(파주시 장단면 소재 유일한 산) 탈환작전이 펼쳐졌다. 당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을 쫓아내기 위해서 김 유공자가 속한 1개 소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산의 아래 쪽에 도달하자 총격전이 시작됐다. 김 유공자도 여러 개 챙긴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팔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유를 몰랐던 그는 정신을 차려보니 수류탄인지 포탄인지 모를 파편들이 팔에 박혀 군복이 피로 물들었던 것. 교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총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 유공자는 "당시 팔이 탱탱 부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죠. 출동할 때 방향을 기억해서 아군 방향의 불빛만 보고 혼자서 부대를 겨우 찾아갔죠"라며 "어찌 갔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요. 파주시 문산읍에 있던 미군해병대 병원에 도착해서 가위로 군복을 찢고, 제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죠"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중상을 입은 병사들이 입원하는 진해해군병원으로 이송된 김 유공자. 그는 "보지도 못했던 팥밥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죠. 아마, 장병들이 부족하니 빨리 회복시켜서 전장에 투입하려는 이유였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김 유공자의 부모님은 "올해는 결혼을 해야 된다"라고 아들에게 통보하고, 곧바로 중매를 추진했다. 지난해 83세의 나이로 세상과 먼저 작별한 박귀연(창선면 부윤마을) 씨를 입원 중에 만나게 됐다.
 그곳에서 팔이 회복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의병제대를 하게 됐을 테지만, 당시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완치된 덕분에 몇 개월 동안 입원 생활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러는 도중에 결혼도 고속으로 진행됐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은 전방의 소총병이 아닌 경기도 어떤 부대의 인사과로 배정받게 된 것. 당시 계급은 병장으로 기억한다.
 김 유공자는 "부상 이후 몇 개월이 지났고 얼마만큼의 군 생활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나요. 제대증도 없고 사진도 없고요"라며 "전역하고 나서는 고향 창선면 수산마을로 돌아갔고, 이후 40세가 되던 해에 상죽마을로 이사를 갔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이 슬하에는 아들 3명과 딸 2명을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천리교의 신실한 신자로서 40년 넘게 교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천리교 창선면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김 유공자는 6·25참전유공자회 경남지부 남해군지회 창선면 부회장을 맡고 있어 유공자들 사이에서도 근면 성실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김 유공자는 "더 이상 인류 역사에서 다툼은 없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내가 먼저 이해를 하고 남한테 줄 수 있어야 해요"라며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숨을 내쉬는 겁니다. 그리고 들이쉬지요. 먼저 줄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철학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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