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공병 이야기 "06군번은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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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공병 이야기 "06군번은 다 죽었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7.21 09:19
  • 호수 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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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2화 최종철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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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된 지뢰의 오작동
파편 목과 몸에 박혀
최종철 6·25 참전 유공자와 지난 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종철 유공자가 당시 적군의 지뢰를 탐지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최종철 6·25 참전 유공자와 지난 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종철 유공자가 당시 적군의 지뢰를 탐지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6·25전쟁, 월남전쟁에서 총알과 수류탄, 포탄 등으로도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지만, 지뢰를 밟거나 크레모아 파편을 맞아 죽음을 맞이한 군인들도 많았다. 이러한 장치는 주로 공병들이 설치한다. 전투병들과는 달리 특수 임무를 수행한 병사로서 6·25에 참전한 최종철(90) 유공자가 당시 공병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부보다는 생존
 1932년 7월 29일, 삼동면 영지마을 최태근·김갑진 부부 사이에서 2명의 형과 본인, 남동생 2명과 막내 여동생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최 유공자. 어린 시절, 공부보다는 생존을 위한 일의 연속이었다. 
 최 유공자는 "여름에는 논을 매고, 풀을 베고, 겨울에는 나무하러 다녔다"며 "집에 장판이 어딨어. 지금 사람들은 이가 뭔지, 벼룩이 뭔지 모르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8세가 되던 해 난영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학년을 건너뛰고 2학년으로 바로 편입됐다고 한다. 최 유공자는 "한 학급에 60명 정도 있었는데, 1학년 공부를 안 하고 바로 2학년 공부를 하니까 못 따라가겠더라"라며 "교장이 일본사람이었다. 아, 또 경찰서장도 일본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일본어를 쓰라고 강요당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쓰고 집에서는 한국어를 썼다고 한다. 
 4년 동안 5학년까지는 일본인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6학년이 될 때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최 유공자만 그랬으랴, 다들 한글을 그때 처음 배웠기 때문에 중학교에 가도 공부는 더 어려웠을 것이고, 또 학비가 없었기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 유공자가 19세가 되던 1941년, 6·25가 한창이던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군대 입대 영장을 받게 된다. 군번은 0664808.
 
김해공병학교
 제주도 훈련소로 향하게 된 최 유공자. 당시 제주도 훈련소에는 6연대가 창설될 시기였는데, 그곳으로 배치 받아서 훈련을 받게 됐다. 훈련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배고픔이 훈련에 임할 수 없게 만드는 악조건이었다. 최 유공자는 "밥그릇 하나에 밥 한 숟가락 담아서 줬다. 훈련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고 말했다. 
 5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부산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추측되는 곳의 운동장에 집결하게 된 훈련병들. 당시 부산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명태 배가 들어온다"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유는 훈련병들이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120명 공병 훈련병 중 최 유공자도 차출돼 군용 트럭에 태워진 채 김해공병학교로 이송됐다.
 최 유공자는 "아마 초등학교 운동장을 훈련소로 썼던 것 같은데, 그곳에서 지뢰도 묻고, 2종 폭발물인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 Trinitrotoluene)을 폭발시키는 훈련도 했다"며 "교육 중 사고가 나면 다 죽기 때문에 무사히 훈련을 마친 게 다행이었다"고 회상했다.
 7주간의 공병 훈련을 마치고 야전 공병부대로 자대배치를 받는 가운데 최 유공자도 사단 직할 공병부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당시 부대 규모를 봤을 때는 여단보다는 연대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방 지역인 강원도 인제군 금화면 소재 부대로 발령을 받은 최 유공자는 "당시 북한사람들은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래서 배가 고파 그 열매를 따먹으러 오는 한국군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 인근에 북한군들이 심은 지뢰가 많았다"며 "금속(지뢰)탐지기로 지뢰를 많이 발견했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당시 북한군이 많이 사용했던 폭발물 중 하나는 나무상자 형태로 만든 `목함지뢰`라고 한다.
 
갑자기 터져버린 지뢰
 어느 날 작전지역에 지뢰를 설치하던 최 유공자의 소대. 그러나 그에게도 큰 사고가 닥쳐온다. 심은 지뢰가 오발로 인해 폭발한 것. 최 유공자는 "지뢰를 묻고 5미터쯤 이동했을 때였나,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많은 부상을 입었다"며 "귀가 막막하고 목이랑 몸에도 파편을 맞았는데 어찌나 고통스럽던지"라고 말했다.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후송을 떠나 다행히 파편을 제거하고 완치할 수 있었다.
 이후 춘천으로 부대를 옮기고 휴전을 맞았지만 여전히 제대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 통이라 휴가도 없고, 제대도 못한 채 부산 소재 미공병기지에서 복무하던 어느 날 제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최 유공자는 "월남전 얘기 나올 때까지 군대에 있었다. 제대 신청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도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분명, 휴전을 했는데도 군 생활은 계속됐고, 5년간의 군 생활 끝에 1946년 제대를 명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군대에 복무하던 당시, 최 유공자의 부모는 아들이 죽기 전에 결혼을 시키기 위해 중매에 나섰다. 그렇게 만난 2살 연하의 부인 김숙휘(상주면 양아마을) 씨. 슬하에는 아들 2명과 딸 1명을 두고 있다.
 전역 후 최 유공자는 10년 넘게 원양어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가정경제를 책임졌다. 
 끝으로, 최 유공자는 후세들에게 "06군번들이 많이 죽었다. 지뢰를 설치하다가 죽고, 오발로 인해 죽고, 한 번 사건이 터지면 피해가 컸다"며 "그렇게 지킨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못 배워서 이렇게 살아왔지만, 여러분은 많이 배웠으니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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