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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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05 10:49
  • 호수 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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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3화 김홍중 월남전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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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건네준 사과 1개로 기사회생
조병창 지나 월남 거쳐
말년까지 훈련 받아
김홍중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지난 21일 남해유배문학관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전시장에 있는 자신이 기증한 월남전 당시 사용하던 수첩을 들고 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홍중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지난 21일 남해유배문학관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전시장에 있는 자신이 기증한 월남전 당시 사용하던 수첩을 들고 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군 생활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다. 아무나 갈 수 없는 부대에서 시작한 군 생활을 시작으로, 곧이어 월남전에서 숱한 전투를 거쳤고, 파병 이후 무사히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육군 제5보병사단에서 혹독한 말년을 보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
 김홍중(金烘仲·75)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김환식·박양녀 부부 슬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에는 1948년 3월 15일로 출생신고가 돼 있지만, 원래는 1947년 8월 20일이다. 지금은 남해읍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고향은 서면 서호마을이다. 
 인생의 첫 장면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시작된다. 5살 무렵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아파서 방 안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음식물을 섭취하기도 어려운 지경, 김 유공자의 어머니 박양녀 씨는 시장에서 사온 조그마한 적당히 붉은 사과 하나를 아들에게 건넸다. 당시 사과는 비싼 과일에 속했다. 어린 김 유공자는 그 사과를 이틀 동안 갉아먹었고 마침내 살아날 수 있었다.
 김 유공자는 "지금 와서 보면, 어머니가 좋은 음식이라도 먹고 원 없이 작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사과를 내게 주신 것 같다"고 회상했다. 
 대서초등학교 9회, 남해중학교 12회 졸업생인 그는 시대 상황이 그랬듯, 하교한 뒤에는 농사일을 돕고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며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똑똑한 편에 속해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당시 동명고등학교(부산광역시 소재)로 유학을 가기 위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21등으로 합격해 입학할 수 있었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1등부터 20등까지는 입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21등은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기에 김 유공자의 부모님은 유학은 어렵다는 뜻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진주, 부산, 서울에서 자급자족

 중학교 졸업 이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그는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게 된다. 김 유공자는 깡통시장의 한 신발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이마저도 6개월 정도 일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서울로 향하게 됐다. 
 이때부터 배고픔의 연속이 시작된다. 김 유공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어 3~4일은 굶기 일쑤였다. 당시 갖고 있던 장갑을 팔아서 호떡 하나 사서 야금야금 먹은 기억이 선명하다"며 "그러다가 진주 출신 2살 위의 형을 만나 미아리에 있는 보세공장에 갔다. 공장 보일러실에서 지내게 됐다. 밥도 얻어먹고, 야간 근무자들의 일을 대신해주며 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17세부터 19세까지 성북구의 여러 보세공장과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공장에서 냉동 공조 기술을 배우며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방도 얻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무렵, 20세가 되던 해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부모님의 연락에 남해로 내려가게 됐다. 중학교 졸업 이후 첫 방문이다.
 신체검사 이후 1970년 10월 7일, 창원 육군 보병39사단 훈련소에 입대하게 된 김 유공자. 이미 배고픈 시절을 지나 입대한 것이기 때문에 배고픔은 그리 힘들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저녁식사를 하는데, 내가 이걸 다 먹으면 군 생활을 끝까지 하고, 못 먹으면 포기한다"고 다짐했다. 그 이유는 당시 무국인지 감자국인지 모르겠지만, 모래가 많고 쉰내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배가 고팠지만 다 먹지 못하고 버렸는데, 김 유공자는 끝내 다 먹고 만다. 군 생활을 해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렇게 받은 군번은 51073274.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되는데, 부산에 있던 제1조병창(무기나 탄약 등을 제작·저장·보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김 유공자는 "당시 조병창에 3명이 선발됐는데 그 중 1명이 `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갔을 때는 뭐 이런 부대가 있었나 싶었다"며 "그만큼 편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어 "예를 들어, 화약을 만드니까 뜨거운 물이 끊일 날이 없었다. 또 밥도 얼마나 잘 나오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 온 병사들은 정부의 고위간부나 소위 말하는 높은 분들의 자제들이 오는 곳이었다"며 "근데, 너무 대놓고 자제들만 보내면 뭣하니까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끼워서 자대배치를 시켰다"고 밝혔다.
 이등병 생활 10개월을 했을까? 월남전 차출 명령이 떨어진 것. 김 유공자는 "아, 이 부대에서 갈 사람은 무조건 나구나 싶었다"며 "차라리 군 생활하는 거 외국 구경도 가고 실제 전투도 해본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제1조병창에서 김 유공자만 베트남으로 향하게 됐다.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훈련소에서 월남전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김 유공자는 "베트남 가기 전날, 권총 같은 주사기를 10방을 맞았는데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며 "병사들이 지나가면 알아서 1방씩 맞았다. 그날 이후 이틀간 열이 나고 몸이 퍼져서 다들 뻗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1971년 7월 11일, 부산항에서 1500명이 타는 큰 배에 탑승한 채 일주일 후 도착한 베트남. 백마부대 30연대 3대대 소속을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캄란 지역 미군 비행장에서 외곽 경계 근무를 섰는데, 월남전에서 가장 많이 하는 작전인 매복을 나가며 서서히 실제 전투에도 투입되기 시작했다고. 훈련에서 두각을 보인 사격실력 덕분에 m14 저격수를 맡았다. 
 
조금만 빗겨났어도 부대는 전멸

 베트남에서 생활한 지도 5~6개월 어떤 산에서 3개 소대 침투 작전에 투입됐는데, 갑자기 날아온 무전, 미군이 함포사격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엎드리고 나무 뒤로 숨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포탄은 예상치 못한 곳에 떨어졌는데, 김 유공자는 "좌표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아니면 착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소대가 작전하던 곳 바로 옆으로 포탄이 떨어졌다"며 "그 파편들이 우리가 숨어있던 나무들에 박혔다. 아마 포탄의 낙하지점이 5m만 틀어졌어도 우리 소대는 전멸했을 것"이라며 그날의 아찔한 상황을 설명했다. 
고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아
 작전에 가기 전 첨병은 먼저 출발해 그 지역의 전황을 먼저 살핀다. 보통 상병이나 병장들이 하는데, 분대나 소대의 선두나 후미에 선다. 김 유공자가 상병일 때 분대의 후미에 서서 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그날은 이상하게도 느낌이, 기분이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맨 뒤에 있던 내가 분대장에게 지금은 가면 안 될 것 같으니 길을 돌리자고 말했다"며 "그러니 내가 맨 앞 첨병이 됐다. 저 멀리 200m 앞에 베트콩 2명을 발견했다. 이놈들이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마, 병력 수가 적어 미행만 했거나 작전 지역을 보고 하기 위해 따라온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 분대는 곧바로 엎드려서 총을 쐈고 그 2명은 쓰러졌다. 시체를 묻어줬다"며 "그날은 피비린내와 그 기억이 떠올라 밥을 못 먹었다"고 밝혔다.
 베트남에서 군 생활 중 200일 넘게 작전에 나간 김 유공자. 1972년 7월 10일 부산항을 통해 다시 한국에 발을 딛게 됐다. 
 베트남에 간다고 부모님께 알리지 않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색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1년 남은 군 생활. 조병창은 고사하고 경기도 양평의 육군 제5보병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군 생활 초반 못한 훈련은 다 받게 된다. 김 유공자는 "중대, 대대, 연대, 공수, 유격, 혹한기, 100km 행군, 데모진압훈련(충성훈련) 등 그때 있던 훈련은 다 했다"며 "말년이 다 돼도 훈련으로 인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악질부대"라고 회상했다.
 
30년 공직생활 후
고엽제 전우 위한 활동 펼쳐

 군 전역 후 둘째 형의 제안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김 유공자. 경남 제1회 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에 산림직 분야에 응시해 49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게 됐다. 
 1974년 9월 1일 고현면사무소에 발령을 받아 남해군청 여러 실과를 거쳐 다시 고현면사무소로 돌아와 명예퇴직으로 30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한다. 
 그 사이 1978년 11월 12일 아내 손경숙(삼동면 지족마을) 씨와 결혼해 아들과 딸 1명씩 낳고 오순도순 가정을 꾸리며 이제는 손주까지 보며 살아가고 있다. 
 전쟁에 대해 김 유공자는 "6·25전쟁이 딱 월남전과 같았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 베트남 아이들이 신도 안 신고 옷도 걸치지 않은 채로 따라오며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며 "전쟁이 나면 사실상, 군인들은 소모품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사회적 약자다.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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