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차례의 전투, 북한군 1개 대대 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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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차례의 전투, 북한군 1개 대대 전멸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05 10:51
  • 호수 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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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4화 강임택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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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1기 병사로 시작해
하사관으로 전역
신실한 기독교 신자 길 걸어
성경책 63회 정독
강임택 6·25 참전 유공자를 지난 22일 본인의 집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강임택 6·25 참전 유공자를 지난 22일 본인의 집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북한에서 전투하면서 큰 공을 세웠지. 휴전 돼도 군 생활이 계속되는 기라…."
 6·25전쟁 남한과 북한 지역을 오며가며 전쟁을 치른 한 남자의 자부심이다. 어쩌면 그만큼 힘들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출가한 아버지
 창선면 단항마을, 집안의 3대 독자인 강병호 씨는 아내 장소분 씨와 결혼해 6남매를 낳는다. 그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강임택(姜任宅·93) 6·25 참전 유공자. 실제 태어난 날은 1929년 10월 17일이지만, 출생신고는 약 3개월 뒤인 1930년 1월 10일에 마쳤다.
 강 유공자가 5세 때 아버지 강병호 씨는 출가해 절에서 다른 사람들의 묏자리도 봐주고, 아픈 사람들에게 약도 지어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강 유공자는 "아버지가 왜 절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일을 했다고 들었지. 젊은 날 막걸리를 많이 드셔서 그런가 55세 나이로 입적했다고 하더라"며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8세의 나이, 강 유공자는 당시 창선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간이학교 개념의 2년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이던 시절, 창선초등학교가 건립되고 입학하게 된 강 유공자. 그는 "2~3학년 때쯤 한글을 아예 못 쓰게 했지. 조선말을 쓰면 혼나고 벌도 섰어"라며 "아, 공출(供出, 일제가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39년부터 실시한 농산물 수탈정책) 때문에 맨날 일본 군인인지 순사들인지 마을을 휘젓고 갔어. 그래서 보리를 가마니에 숨겼었지"라고 회상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됐지만, 당시 창선면에는 흉년이 들어 논밭에 곡물을 못 심고, 수확도 어려워 굶은 사람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강 유공자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도 없어서 곧바로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창선은 또 바다가 있으니까 배를 타는 아이들도 많았어. 머슴 일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라고 설명했다.
 
남해군 징집 기수 1기
 6·25전쟁이 발발하고 20세가 된 강 유공자는 남해군 징집 1기로서 당시 창선면에는 36명이, 남해군에는 300명 정도 남해읍에 한 운동장에 모였다고 한다. 아마 남해초등학교일 것으로 추측된다.
 김 유공자는 "징집 1기생들은 창선에서 배를 타고 삼천포로 가서, 또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용두산으로 면접을 보러 갔지. 똘똘한 사람은 해병대로 보내고, 시원찮은 사람은 육군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더라고"라며 "집에 가는 아이들은 집에 돈이 많은지 아니면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해병대로 발탁된 기라"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해병대 11기 병사 군번 9214220를 배정받고 진해 경화동에 위치한 해군훈련소에 입대하게 된다. 그날은 1951년 10월 10일로 기억한다.
 

강임택 6·25 참전 유공자가 수 십 년간 읽은 성경책. 1회씩 완독하며 기록한 종이에 빼곡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2022년 4월 12일 63회 완독했다.
강임택 6·25 참전 유공자가 수 십 년간 읽은 성경책. 1회씩 완독하며 기록한 종이에 빼곡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2022년 4월 12일 63회 완독했다.

진짜 북한에 도착한 해병대 11기
 5주간 훈련을 마치고 LST 상륙함(보급선으로도 이용함)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강 유공자는 "아무리 전쟁 중이었지만 내는 무슨 북한까지 가는 줄 알았어.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아"라며 "근데 큰 섬 하나가 보이는데 부산 오륙도인 거라. 또 한참을 가는데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육지가 안 보여. 밤새도록 배는 이동했지. 이정도 갔으면 북한에 도착해도 진작 도착했을 텐데"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을 곱씹었다.
 배가 멈춰선 곳은 북한이었다. 
 강 유공자는 "함경남도 원산시(현 북한 강원도 소속)에서 며칠 머물렀다가 다시 배를 타라고 해서 탔더니, 함경북도 길주군 양도 섬까지 가는 거 있제. 진짜 북한에 갈 줄을 몰랐지"라며 "도착해서 먼저 임시 막사를 정비하고, 철조망 설치하고, 교통호도 파고, 지뢰도 심었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양도에는 16개 정도 집이 있었는데 다 노인들만 있었어. 당연히 북한 사람들이지. 그들과는 접점이 없었지"라며 "다행히 먹을 건 잘 주더라고. 밥은 본부중대로부터 추진을 받았는데, 본부중대는 양도 어딘가에 있었겠지"라고 말했다. 당시 강 유공자가 맡은 보직은 기관총 사수였다.
 
북한군 1개 대대 섬멸
 양도에는 단 한 번 북한군이 침투했는데, 이는 곧 가장 큰 공적을 세우게 되는 사건이 된다. 
 강 유공자는 "북한군 1개 대대 정도 병력이 밤에 몰래 침투했지. 자기네들 지역이었으니까 지리를 알았겠지. 이놈들이 경계 서던 우리 병사랑 통신병을 죽이고, 통신선도 다 끊었어"라며 "이 사실을 우리 부대가 알게 됐고, 벙커에 숨어서 때를 노리고 있었지. 북한군은 서서히 섬 정상으로 수색하면서 올라갔지"라고 정황을 설명했다. 
 이어진 해병대 박격포 부대와 전함의 사격. 강 유공자의 부대가 지원 요청을 한 것. 포 사격이 끝나자 해병대 보병들은 정상으로 향했고 남아있던 북한군을 무찌르며 섬멸하는 큰 공을 세우게 됐다. 해병대는 12명이 사망했고 북한군은 1개 대대가 그대로 전멸했다.
 전투 이후 계속해서 경계와 교육·훈련의 반복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이 체결될 때까지 강 유공자의 부대는 양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끝나지 않는 군 생활
 휴전 후 더 이상 양도에 주둔할 수 없었던 강 유공자의 부대는 해병대 여단이 창설되던 시기에 맞춰 부산으로 향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병사에서 하사관으로 진급하게 됐고, 하사관 군번 7207338이다. 그 시기에 중매를 통해 아내 정재인 씨를 만나 남해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슬하에 7남매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냈다.
 어쨌든, 부산에서의 군 생활도 녹록지만은 않았다. 박격포 반장을 하던 때 일이다. 강 유공자는 "병사들이 권총을 손질하는데 오발탄이 나가서 손을 관통하는 일도 있었지. 크고 작은 일에 박격포 반장이라고 얼마나 많이 불려 다녔는지"라며 한숨을 쉬는 그이다. 그렇게 병과를 바꿔서 육군통신학교(당시 광주광역시 소재)에서 통신교육을 받았다. 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거는 뭐, 고등학교는 나와야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인 기라"라며 "한글도 알아야지요, 숫자도 알아야지요, 영어도 알아야지요. 부호 공부도 해야 되지요"라고 말하며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통신학교 수료 후 백령도에서 1년, 연평도, 경기도의 육지 지역 어딘가, 여러 곳을 거쳐 제대한 지역은 경기도 김포시였다. 그의 기억에는 1958년 1월 10일 이등병조(하사) 계급으로 전역을 명받았다. 그리고 다시 고향 창선면 단항마을에서 민간인의 삶을 이어갔다. 
 
큰 형 대신 가게 된 교회

 강 유공자의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고부터 확 달라졌다. 술·담배도 끊고 생활도 경건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는 "18세 때인가? 큰 형님이 아무도 모르게 창선교회를 다니고 있더라고"라며 "근데 어떤 날에 나보고 좀 대신 가달라고 해서 갔는데, 그때 천국을 만났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나`라는 존재에게 손을 잡아주고 배고픈 내한테 먹을 것도 준 곳이었제"라며 "제대하고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제"라고 말했다. 
 40세에 회계한 그는 55세에 장로로 임직해서 70세의 나이에 은퇴한 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올해 4월 12일 총 63회의 성경책을 완독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성경을 읽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면 되겠는가?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많이 까먹었제. 안 잊어버리려고 보는 거지"라고 이유를 밝혔다.
 끝으로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친 곳 없이 무사히 전역한 강 유공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믿음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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