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도련님에서 전쟁통 하사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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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도련님에서 전쟁통 하사관으로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11 17:35
  • 호수 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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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5화 │ 조순태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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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에도 이어진 총 6년의 군 생활
지난달 23일 남해읍 섬호마을에 위치한 조순태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순태(왼쪽) 유공자와 그의 부인 최명례(오른쪽) 씨다. 최명례 씨가 당시 상황들을 들어온 터라 인터뷰에 많은 도움을 줬다.
지난달 23일 남해읍 섬호마을에 위치한 조순태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순태(왼쪽) 유공자와 그의 부인 최명례(오른쪽) 씨다. 최명례 씨가 당시 상황들을 들어온 터라 인터뷰에 많은 도움을 줬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 협정이 성사됐다. 
 휴전 이후 "(일등)상사로 진급하고 계속 군 생활할래?"라는 상관의 반강제와 같은 제안은 전쟁으로 지친 그에게는 무거운 압박이었다. 조순태(趙順太·95) 6·25 참전 유공자의 군 생활 끝자락의 장면이다.
 
섬호마을 대농의 아들로 태어나
 "남해군에서 3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대농이었제." 인생의 많은 장면이 삭제됐지만 9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이것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조 유공자는 1928년 1월 3일 남해읍 섬호마을에서 조봉준·윤이녀 부부의 3남 1녀 중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논밭을 수백 마지기를 소유하고 있어 어릴 적 조 유공자는 대농의 아들로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조 유공자는 "아버지가 5형제 중에 막내인데 배고픈 사람들한테 밥도 주고 술도 주고 했었어"라며 "일제강점기였지만, 우리 집에서 농사를 크게 많이 지으니까 사람들을 많이 썼던 걸로 기억해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가세가 기울면서 조 유공자는 당시 외갓집이던 서면 상남마을로 맡겨지게 됐다. 조 유공자는 그곳에서 8살이 되던 해인 1936년 당시 초등학교 입학 전 다니던 학교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1시간 넘게 짚신 신고 오며가며 했던 학교가 서상마을에 있었다. 한 반에 40명씩이었는데, 일본어를 많이 배웠고 공부도 잘한 것 같아"라고 회상했다. 아마, 조 유공자는 성명사립보통학교(1928년 5월 1일 개교)를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또, 망운사에서 천자문을 배웠다는데 이 기억도 여기까지다.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은의 꿈은 접어야 했던 조 유공자. 어머니 윤이녀 씨를 따라 이사를 갔다는 것 말고는 10대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는 "초등학교 이후로 별 일 없이 지낸 것 같아. 돈은 없제, 먹을 것도 없제, 고매(고구마)도 팔고, 나무 패고, 쇠도 멕이고, 나머지는 기억이 안 나…."
 
모든 게 열악한 훈련 환경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2년 1월(설 무렵) 조 유공자도 25세 건장한 청년으로서 입대하게 된다. 그는 "내 군번이 0678980(하사관 군번)인데, 이 군번에 받아 입대한 사람들이 다 똑똑이들이라. 그러니까 하사관이 됐제"라고 설명했다. 남해읍 죽산마을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곧바로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훈련소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 조 유공자. "LCT(Landing Craft Transporter 상륙정) 군함타고 제주도로 갔어"라고 덧붙였다. 영어 LCT를 정확히 기억하는 그이다.
 모슬포에 도착하자 막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군에서 빌려준 천막을 빌려서 임시로 막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 유공자는 "내복 2벌, 작업복 2벌이 다였고, 지게로 나무를 지고 불도 쏘고, 지하수를 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먹었제"라며 "그래도, 물이 귀하니까 씻지도 못하고 냇가에서 겨우 목을 축이고 그랬어"라고 말했다. 이어 "밥도 콩나물 조금 들어간 걸로 둘이서 나눠 먹고 간에 기별이나 가겠는가?"라며 "도망가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라고 회상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중공군
 조 유공자는 훈련소를 마치고 부산과 춘천에서 보충대 역할을 하는 곳에서 일주일을 대기했다. 이후 자대는 강원도 화천군 중부전선을 담당했던 육군 제6보병사단에 배속됐고, 그곳에서 훈련에 성실히 임하며 우수한 모습을 보인 덕분에 조교로 1년 동안 복무했다. 
 본격적인 군 생활은 하사관이 되면서부터인데, 그는 6사단에서 하사관 복무를 제안 받고 3개 월동안 교육 받았다.
 조 유공자는 "당시 또렷이 기억하는 게 있어. 하사관 교육생 당시, 교관이 하는 말이 북한하고 남한하고 싸우면 남한이 못 이긴다고 하더라도. 왜냐면, 북한에는 탄광이 있고 지하자원이 많아서 좋은 재료로 총을 만들고, 또 총열도 오래 간다는 기라"라며 "또, 중국이 북한을 억수로 도우니까, 아휴 중국 인해전술 알지요? 지금은 몰라도 6·25전쟁 당시에는 그만큼 북한군·인민군이 강했다는 거겠제"라고 말했다.
과도한 열을 받아 막힌 총열
 하사관이 된 조 유공자는 6사단의 정확한 소속은 모르지만, 무반동총(M20, 75mm)을 관리하는 선임하사의 역할을 맡게 됐다. 
 조 유공자는 "쌍원경으로 보면, 임진강 동쪽 건너편에 있는 북한 시내가 다 보여"라며 가까워진 전장을 설명했다. 
 어느 날 새벽 비가 내리는 날, 대대본부는 10리쯤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조 유공자는 "내가 무반동총반장을 하고 북한이랑 인접한 지역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대응사격을 해도 하도 많이 쏘니까 총열이 열을 받아서 발사가 안 되는 거라"라며 "교전이 있었는데, 다행히 큰 아군 피해는 없었던 것 같어. 근데, 하사관 교육받았을 때 총열이 금방 뜨거워지니까 확실히 장비가 안 좋다는 얘기가 기억나더라고"라고 설명했다. 
 
휴전 후 계속된 군 생활
 다행히 건강히 휴전을 맞이한 조 유공자. 육군 보병8사단에서 부식창고와 물자관리 등을 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고 병력들의 인사이동을 담당하는 인사담당관으로도 근무했다. 
 조 유공자는 "내가 전역할 때 결국 일등상사를 못 달고 나왔거든. 그때 월급이 이발비 정도였던 것 같아"라며 "장병들은 배고파 죽는데, 이등상사(지금의 상사) 이상 고급하사관들은 월급이 많았거든. 사리사욕 채우는 간부들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만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제"라고 말했다.
 결국, 일등상사 진급이라는 유혹 앞에서 전쟁 경험과 군대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전역의 길을 선택한 조 유공자. 그는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6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58년 고향 남해읍 섬호마을로 향하게 됐다. 이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 조 유공자는 최명례(86) 씨를 만나 1956년에 결혼한 후 남해읍 토촌마을로 이사를 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슬하에는 1남 6녀 7남매가 있고, 손자 14명, 증손자 4명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조 유공자는 "전쟁 나면 힘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기고, 없는 사람들만 불쌍한 기라. 당시 죽은 사람이며 다친 사람이며 얼마나 많았는가"라며 "인자는 기억도 없어갖고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 세월이 야속할 뿐이제"라고 푸념하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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