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름에 응한 우리에게 `민간인 학살`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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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름에 응한 우리에게 `민간인 학살`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11 17:40
  • 호수 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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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6화 │ 이충방 월남전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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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수집하는 첩보 활동 펼쳐
이충방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지난 5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날 이충방 유공자가 갖고 있던 사진들을 기증하기 위해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를 찾았다.
이충방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지난 5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날 이충방 유공자가 갖고 있던 사진들을 기증하기 위해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를 찾았다.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은 몰라요. 나라가 공산주의로 안 넘어가게끔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고 대비해야 해요. 젊은 날 국가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민간인 학살`이라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릴 때마다 가슴이 무너집니다."
 제2대 월남전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역임한 이충방(李充邦·79) 월남전 참전 유공자의 마지막 당부의 말이다. 
 
공부를 잘했던 어린 시절
 이동면 광두마을에 터를 잡은 지 오래지만 유년시절은 부모님이 부산에서 일을 한 터라 이충방 유공자가 태어난 곳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이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 이민옥 씨와 어머니 문막순 씨 사이에서 1944년 1월 18일에 태어난 이 유공자는 밑으로 남동생,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 3남 1녀 중 장남이다.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도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못해 이 유공자는 이동면 광두마을에 살던 할아버지(이윤도) 집에 맡겨지게 된다. 
 이 유공자는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할아버지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어린시절은 광두마을에서 보냈지요"라며 "다초초등학교 8회 졸업생이랍니다"라고 소개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평범하고 비교적 조용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 유공자는 부모님이 있는 영도로 가서 해동중학교로 입학하게 됐다. 그러나 입학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야간학교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공부도 잘해 당시 들어가기 어려웠던 경남상업고등학교(현 부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실업반과 인문반 두 개의 큰 분반이 있었는데, 이 유공자는 인문반에 입학했다. 그만큼 대학진학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이 유공자의 열망은 현실로 나타나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62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
 이 유공자는 "자취를 해야 하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이라 많은 부모님께 많은 지원을 받지는 못했어요. 그때 연세대학교는 부잣집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였거든요. 서울 생활이 외롭기도 했죠"라며 "그래서 학교 마치고 바로 집에 와서 공부하고 등록금 때문에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밝혔다.
 
은행원을 꿈꿨던 청년
 대학교 3학년 등록금까지는 어찌어찌 겨우 마련해 다니고 있던 1964년 여름, 1학기를 마치고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어차피 군대도 가야하고 입대를 위해 휴학 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렇게 다음 해인 1966년 2월 3일 신체검사를 받고 입대에 이르렀다. 당시 창원시에 있던 39사단에서 5주간 군사기초훈련을 받았고, 이후 광주광역시의 포병학교에서 6주간 주특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 유공자는 "포병학교에는 포반과 측지반 2개가 있었는데, 저는 측지반에 배속됐어요"라며 "지형지물의 상태나 면적, 거리 등을 측적하는 임무였지요"라고 설명했다. 
 포병부대에서 측지병은 포의 발사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수학을 잘했던 이력도 있어 이 유공자가 발탁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춘천시 103보충대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기간을 거쳐  9사단 52포병대대 본부중대 포반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이 유공자는 당시 자대를 경기도 양평으로 기억하는데 불분명하다. 현재 9사단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으며 52포병대대(현재 여단급)는 파주시에 위치해 있다.
 자대배치 받은 지 얼마지 나지 않아 9사단 즉, 백마부대는 사단 전체가 월남전으로 파병을 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받게 된다. 보통은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에 있는 월남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이때는 사단 전체가 파병 예정이라 사단에서 월남전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 유공자는 "막사들이 다 낡아서 보수하면서 훈련을 받았죠. 먹을 것도 부족하고 훈련과 작업의 연속이었어요"라며 "3개월 정도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 중 포탄통인가 뭔가를 밟았는데 왼쪽 발바닥이 찢어졌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때 부모님한테 월남전에 참전한다고 하니까 되게 혼났죠. 아무래도 장남이니까. 근데 다쳤다는 얘기는 안 했습니다. 더 걱정하실까봐"라며 "아마 목발 짚고 파병 간 사람은 저 밖에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군인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게 1966년 10월의 어느 날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부산항에 집결한 백마부대는 미군 수송선을 탔다. 이 유공자는 당시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마중 나온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목발은 잠시 숨겨두고 몇 번이고 외친 덕에 서로 눈이 마주쳤다. 들리지 않았겠지만 아들은 "염려하지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주일을 달려 도착한 캄란항.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특별전시회장에 유일하게 기증된 선풍기. 이충방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부모님을 위해 선물한 선풍기다. 지금도 전원을 켜면 작동된다.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특별전시회장에 유일하게 기증된 선풍기. 이충방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부모님을 위해 선물한 선풍기다. 지금도 전원을 켜면 작동된다.

한국에서 엘리트, 월남에서도 엘리트
 9사단에 있을 때부터 측지병으로 발탁되기까지 눈에 띄었던 이 유공자는 베트남에 와서도 육군본부 인사행정병으로 배치 받게 된다. 6개월을 행정병으로 업무를 수행했고, 이후 백마무대 30연대 내의 보안부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보안과 서무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 유공자는 "10개월쯤 지났을까, 30연대 3대대 파견대장으로 임무가 바뀌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계급도 가려지고 그냥 파견대장이거든요"라며 "대대의 보안업무를 관장하는 역할이지요. 작전과 전투에도 관여하고, 주 업무는 정보를 수집하는 거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보 수집은 마을과 일반 베트남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많았다. 특수한 임무였기에 가슴 쪽에는 권총을 항상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이 잘못됐을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어야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유공자는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을 좋아했어요. 우리가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먹을 것을 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베트남 사람들에게 씨레이션(전투식량)도 주고 무거운 짐도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았죠"라며 "제가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백마 9호 작전에 활용됐죠. 당시 전장에 나갔다고 포탄 파편이 다리에 박히기도 했지만요"라고 회상했다.
 이외에도 철마 3호 작전과 다양한 작전을 참전하며 파견대장 생활을 이어갔다. 파견대장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1년. 보통 월남전 참전 1년이면 귀국을 해야 하는데 귀국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 계급이 없는 상태라는 건 병사가 아님을 의미하며 이는 비공식적으로 장교로서 활동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파병일이 길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베트남에 온 지 햇수로 3년째, 1969년 3월 8일 캄란항에서 출항해 3월 15일부로 귀국과 동시에 제대를 명받은 이 유공자. 제대 전 최명신 주월사령관으로부터 표창장도 받고 특진도 하며 여러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고 한다.
 베트남에 다녀오는 동안 아버지는 경찰에 대한 회의감으로 경찰관을 그만둔 상태였고, 대학생으로 복학하기에는 등록금과 자취 생활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부담스러워 포기했다고 한다.
 남해에서 잠시 있는 동안 지금의 아내 최선심(75·남해읍 선소마을) 씨를 만나 딸 2명과 아들 2명 4남매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다. 
 이후 친구의 제안으로 경기도 안성시에 소재한 젖소목장에서 일을 하고, 과수원 일도 배우는 등 농사에 적응해 갈 때 아버지가 제안한다. "어차피 농사를 지을 거면 고향에서 짓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며 다시 남해로 향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렇게 이 유공자는 1977년 4월 다시 남해로 완전히 정착해 어장 관리도 하고, 배를 타는 어업에도 일을 넓히며 어촌계장, 이동면 농촌지도자 회장 등을 지냈다. 특히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제2대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유공자 남해군지회장을 역임하며 월남전 참전 유공자로서 긍지를 이어갔다.
 이 유공자는 "못 먹고 못 살던 때, 국가의 부름으로 월남전에 파병을 갔는데, 젊은 나이에 참전자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습니까? 전사자가 5099명, 부상자가 1만여명, 고엽제로 신음하는 사람이 많은데 10만명이 넘어요"라며 "우리의 목숨을 바쳐 번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도 닦고 울산 공단도 만들고, 많은 국가 기반 시설이 들었습니다. 물론, 월남전 참전 유공자들만의 결과는 아니지만 지금 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분명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라는 것이지요"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지금 젊은 사람들이 우리 세대 보고 꼰대라고 하지요?"라고 웃으며 "그래도 우리 세대가 여러분이 누리는 여러 혜택을 만들어준 사람이라는 것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거듭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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