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고지전투 참전 "전사한 아군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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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고지전투 참전 "전사한 아군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어"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18 10:55
  • 호수 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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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7화 │ 정태기 6·25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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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직전 16차례 고지 주인이 바뀐 전투

 6·25전쟁 발발 이후 남한과 북한이 휴전협정(정전회담)을 체결하기 전 서로 협정에 있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야 했다. 중국군 제60군은 1953년 6월 10일 일몰 때 동시방면으로 남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중 중국군 제33사단은 한국군 제20사단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6월 22일까지 13일 간 총 18차례 공격과 반격을 펼쳐가며 한국군은 16차례 고지를 탈환했다. 결국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8선 이북 지역인 최전방 양구 지역을 수호할 수 있었다. 이를 `M-1고지전투`라고 부른다. 
 M-1고지전투에 참전한 정태기(鄭太基·89) 6·25 참전 유공자는 육군 제20사단 61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 소속 병사로서 "한국군이 아무리 많아도 M-1고지(강원도 양구 소재 인근 고지)는 절대 탈환하지 못한다고 어찌나 방송을 하는지…. 하루에 4번이나 M-1고지를 탈환하려고 쳐들어간 적도 있었제"라고 회상했다. 

지난 12일 정태기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12일 정태기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면 서호마을 징집 1기 5명
 정 유공자는 서면 서호마을에서 정명호·곽희엽 부부 슬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 유공자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 2명, 남동생 2명이 차례로 있다. 정 유공자는 원래 1931년 12월 17일생이지만 돌을 넘기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출생신고는 2년 후인 1933년에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였던 그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된 초·중·고등학교가 없었기에 초등학교 대신 강습소를 다녔다. 그러나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정 유공자는 "먹을 것도 없어서 학교 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제. 그때는 초등학교도 없어서 대서초등학교(현 신용보증기금 연수원)에 있었던 강습소에 공부하러 다녔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3학년 3학기까지만 다니고 졸업을 못했어"라며 "그래도 동생들은 전부 초등학교는 졸업했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때 먹을 게 어디 있겠어. 나물 캐서 죽 쒀 먹고, 국도 끓여 먹고, 아이고, 우리 부락에는 보리밥 먹는 집도 손가락에 꼽았어"라고 회상했다.
 동생들 뒷바라지와 집의 농사일을 거들던 청소년기의 끝자락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같은 해 가을 17세(실제 19세)인 정 유공자에게도 징집명령이 떨어진다. 
 정 유공자는 "우리 부락에서 내를 포함해서 총 5명이 징집 대상에 들어갔어. 우리가 남해군 징집 대상 1기였제 아마, 그때 서면사무소가 축항 인근에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돼지 1마리를 잡아서 대대적인 환송식을 해줬거든"이라며 "다들 말은 안 해도 전쟁에 끌려가면 죽으러 가는 걸로 알았으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정 유공자를 포함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2명, 나머지 3명은 결혼한 상태였다. 아들이 결혼도 못하고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었기에 급하게 결혼시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서상항에서 배를 타고 노량을 지나 경북 포항에 소재한 훈련소에 도착한 정 유공자.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솔직히 집에서 일만 하고 고생만 하던 터라 한편으로는 나라를 지키는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마음에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제주도 훈련소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받은 정 유공자. 군번은 92117로 기억한다. 당시 1개 대대 800명와 본부중대 의무중대, 취사중대 등 모두 합쳐 1천명 정도가 훈련소에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정 유공자는 "제주도가 화산지형이라 그런지 흙이 까매"라며 "먼지도 많고 그래서인지 눈병 환자도 많았제. 배식도 밥 한 덩이로 4명씩 갈라 먹어야 했고, 국에 흙이 많아서 설사 환자도 많았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 유공자는 자신이 최전방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 중 하나가 `선발대 자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는 앞에 훈련병들이나 교관들이 하는 말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게 `선발대에 들어라`라는 거였어"라며 "북한 인민군들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선발대(첨병 역할) 뒤에는 주 부대가 있다는 걸 안다는 기라. 그래서 확률적으로 주 부대를 타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발대는 비교적 덜 공격받는다는 얘기제"라고 근거를 들었다. 

지난 12일 정태기(왼쪽) 6·25전쟁 참전유공자가 자택 마당에서 친한 친구인 최준환(오른쪽)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 위원장과 나란히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지난 12일 정태기(왼쪽) 6·25전쟁 참전유공자가 자택 마당에서 친한 친구인 최준환(오른쪽)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 위원장과 나란히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선명히 기억하는 M-1고지전투
 2개월의 훈련을 마친 정 유공자는 강원도 양구군에 있던 육군 제20보병사단에 배속을 받게 된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20사단은 1953년 2월 9일 창설됐기에 당시 준비사단이거나 다른 사단에 자대 배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직은 lmg 소형기관총 사수로서 1951년 1월 강원도 이천군(현 북한) 소재 문동리고지(907.4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고 한다.
 더위가 찾아온 1953년 6월 10일, 당시 한국군 제20사단은 938고지를 중심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해 삼각산(1220m)·어은산(1277m)·백석산(1142m)으로 이어지는 능선 지역에서 중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정 유공자는 "우리 부대는 어은산 고지가 작전지역이었는데, 낮에는 한국군이 점령해도 밤에는 중국군이 M-1고지를 점령해서 공격과 수비가 계속 바뀌었제"라며 "중대장이 내랑 다른 병사 6명을 수색대로 편성해서 적 동태를 살피라고 보낸 거야. 근데 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까 숨을 수밖에 없었제. 여기는 이미 전투가 많아서 호가 많았거든"이라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옆에 시체도 많고 포가 떨어지니까 충격으로 숨어 있던 호도 가라앉데? 차라리 흙에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라며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포격이 멈추고 중국군이 수색을 하는데, 다행히 잘 숨은 덕분에 고마 지나가더라고. 겨우 살았제. 정신 차리고 보니까 목에 피가 나고 있대? 아마 포 파편이 스치고 지나갔을 거라"라고 회상했다.
 한편, 6월 13~14일 M-1고지에서는 한국군과 중국군이 6차례나 서로 고지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6월 21일에는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하루에만 M-1고지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는 격전이 벌어졌다. 6월 22일 미군 전폭기의 공중 지원과 한국군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아 결국 M-1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휴전협정 이후 제대, 5명 중 2명 생존
 M-1고지전투 이후 20사단 61연대는 경기도 이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이후 정 유공자는 두 집안 사이의 중매로 아내 박봉이(고현면 이어마을·82) 씨를 만나 첫째 아들, 딸 셋, 막내아들까지 총 5남매를 낳아 건강히 잘 살고 있다.
 정 유공자는 "전쟁 중에 휴가가 어디 있겠느냐만 결혼식을 해야 한다고 보고하니까 5일이나 휴가를 주데? 다른 지역은 2~3일 주는데, 남해는 머니까 많이 주더라고"라며 "그래서 서울 용산역에서 전라남도선 밤기차를 타고 어찌어찌 남해로 와서 이어마을에서 결혼식 올리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제"라고 말했다.
 결혼식 시기에 함께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박훈간·중공군) 사령관 간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정 유공자는 "죽을 줄 알았는데 휴전이 됐다 하니까 너무 좋았제. 아, 우리 부락에서 내랑 같이 간 4명은 어찌 됐냐고? 김은섭이라고 내랑 갑장 친구는 살아남았고 다른 3명은 소식을 못 들었어"라며 "아마 전사한 거겠제"라고 말을 아꼈다.
 정 유공자는 후세에게 "우리나라는 지금 종전이 아니고 휴전국가야. 6·25를 겪어보니까 전쟁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돼. 그래서 안보교육이 필요한 기라"라며 "6·25를 잊으면 반드시 다시 발생할 거야. 전쟁은 방심할 때 일어나거든"이라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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