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생은 마치 계획된 듯이 도전의 성과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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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은 마치 계획된 듯이 도전의 성과로 이뤄진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8.25 10:50
  • 호수 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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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8화 서상길 월남전 참전유공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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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진학, 은행 입사 특수부대 편입
보기 드문 월남전 주월사령부 정보부대 병사

 국군정보부대 행정병, 사진병, 첩보수집 활동 등 남들은 하나 맡기 어려운 보직과 임무를 두루 맡으며 그야말로 남다른 군 생활을 펼친 엘리트 병사가 있다. 본인은 운이 좋았고 시험을 잘 쳤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인생은 늘 도전이었고 도전에 따른 성취에서 비롯된 것처럼 군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서상길(徐相吉·73) 월남전 참전유공자는 지금도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국장으로서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전쟁 참전유공자들의 기록을 남기고 흔적을 모으며 보훈을 널리 알리는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서상길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지난 6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상길 유공자가 자신이 기증한 사진과 관련한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서상길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지난 6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상길 유공자가 자신이 기증한 사진과 관련한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유서 깊은 부산 망미동의 서 씨 가문
 서 유공자는 임진왜란(1592년) 이후 현재까지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뿌리 내린 유서 깊은 서 씨 문중의 자제이다. 그는 아버지 서광호, 어머니 강필형 부부 사이에서 1949년 8월 25일에 태어났다.
 그는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서, 지금은 신도시이지만 당시 시골이었던 망미동에서는 그나마 나은 경제적 환경에서 생활했다. 이는 교장까지 지낸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집에서 수영초등학교까지 3km 정도의 거리를 걸어다닌 기억이 있는 서 유공자는 "쌀밥까지는 아니어도 먹을 게 없어서 굶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어린 시절을 설명했다.
 
6·25 이후 초등학생의 기억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멈춘 가운데 국가의 기반과 시설은 황폐해지고, 난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서 유공자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때라 넝마주이들이 많았는데, 종종 패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무기도 들고 서로 쫓아가고 때리는 모습이 선명합니다"라며 "미군들이 초콜릿이나 껌 같이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뿌렸죠. 아, 우리 마을 바로 앞에 미군이 고아원을 지었는데, 어떤 한국 할머니가 원장을 맡았어요. 영어를 잘하더라고요"라고 회상했다. 덧붙여 서 유공자는 "고아원에 있던 전쟁고아들은 돼지 밥을 주고 돼지 돌보는 일을 했는데, 돼지로 수익사업을 했겠죠? 혹시라도 돼지가 죽으면 아이들이 크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사람보다 돼지가 귀했던 걸로 여겨졌나 봐요"라고 밝혔다. 

어릴 때부터 확고한 목표와 노력
 당시에는 중학교 진학시험에서 합격점수를 받아야 중학교 입학이 가능했다. 또 가정환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됐기에 서 유공자는 일찍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영초등학교 40회 졸업생인 서 유공자는 초등학교 졸업 당시 진학시험을 친 동기 중 유일하게 일류중학교에 입학했고, 중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덕에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중·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서 유공자는 "직업이 많은 시대도 아니었고, 당시 어른들도 말씀하시길 은행원이 안정적이고 연봉도 잘 받을 수 있다 해서 고등학교 진학도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죠"라고 밝혔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당연한 것이 당시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은행에 가장 많이 입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서 유공자는 부산상업고등학교 제55회 졸업생으로서 1968년 3월 곧바로 부산은행에 입사하게 된다.
 
운명을 바꾼 날
 부산은행에서 1년 6개월 동안 근무한 그의 나이 21세. 군 입대를 위해 휴직을 하고 1969년 9월 논산훈련소로 입소한다. 군번은 11993054.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 군사기초훈련을 마치고, 105mm 박격포 주특기를 배정받아 후반기 주특기 교육을 마쳐가던 어느 날, 상급부대에서 우수한 병사를 차출하기 위해 논산훈련소를 방문했다. 
 서 유공자는 "그날이 제 군 생활의 운명을 바꾼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훈련소에 큰 노천 세면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병사들이 많은 거예요. 왜 그런지 가보니까 상급부대 인사담당자가 병사들을 면담하고 있던 거예요"라며 "저도 그 자리에서 부산은행에서 일하다가 입대했고 글씨도 잘 쓰고, 서류관리나 계산, 주산 등 능력이 있다고 알렸어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자 그 인사담당자가 신상명세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고 저는 곧바로 작성해서 다시 찾아갔지만 그 분이 없는 거예요"라며 "낙심해서 PX에 갔다가 나왔는데 그 인사담당자가 타고 있는 차를 발견했죠. 뒤도 볼 것 없이 바로 뛰어가서 차를 세우고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쨌든 저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적극적인 자기주장에 국군정보사령부로
 서 유공자를 선택한 인사담당자는 여러 특수 부대 중 국방부 산하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사병계장(준위 21호봉)이었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서 유공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소재해 있던 국군정보사령부 산하 사병계에서 병력담당을 맡게 됐다. 국군정보사령부는 해외·대북 군사정보 수집과 기밀 첩보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곳에서 서 유공자는 월남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육군본부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병사 인적사항과 관련된 업무를 맡아 관리하는 게 주 업무였다. 
 국군정보사령부 생활에 대해 서 유공자는 "일반 병사들보다 몸은 편했던 게 사실이에요. 서울에 부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혜택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먹는 거나 시설 이용이나 보급품도 최전방, 전방부대보다는 괜찮았을 거예요"라며 "대신, 그만큼 국군의 인사를 관리해야 되고 고위 간부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다 보니 늘 긴장하고 정신적으로는 피곤했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밝혔다.
 자대에서도 잘 적응하고 성실히 생활한 덕에 국군정보사령부 인사처장(대령)의 눈에 들어 인사처장의 당번병을 맡게 된 서 유공자. 이 일이 그가 월남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사처장이 주월군사정보부대의 부대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 인사처장은 서 유공자에게 제안한다. "월남에 가자"라고 말이다.
 제안에 대해 서 유공자는 "월남전에 참전한 장교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궁금하기도 했죠. 무엇보다 저를 아껴주고 제가 모시던 상관이 가는데 제가 안 가는 것도 맞지 않았고, 남자라면 한 번은 경험해 볼법하다는 마음을 먹고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죠"라고 밝혔다. 
 그렇게 서 유공자도 육군 병사들이 월남전 파병을 위해 훈련을 받던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훈련소에서 5주 동안 같은 훈련을 받는다. 
 군 입대 후 22개월이 되던 1971년 7월의 어느 날 서 유공자도 파병 인파 속에서 부산항 환송식장에 있었다. 그는 "환송식 노래까지 끝나고 출발을 알리는 큰 배의 경적소리에 울먹이는 병사들이 많더라고요"라며 "육지가 전혀 안 보이는 수평선을 한참 지나 망망대해를 5~6일 걸렸을까요? 무사히 베트남 캄란항에 도착했죠"라고 말했다.
 
정보부대장 전속부관의 역할
 베트남에 첫 발을 내딛은 서 유공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도로였다. 서 유공자는 "캄란항에 도착해서 육지를 밟았을 때 아스팔트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실제로 밟아보니 이렇게 물렁물렁할 수가 있나 싶었죠. 그만큼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던 시기였어요"라고 설명했다.
 서 유공자는 주월군사정보부대 소속이었기에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본부에서 보낸 지프차를 타고 나트랑에 위치해 있던 군사정보부대에 도착했다. 
 그의 첫 직책은 앞서 국군정보사령부 인사처장의 당번병을 수행했기에, 정보부대장의 전속부관 역할 겸 당번장을 맡았다. 당번장은 조리병과 운전병 등 여러 특수 임무를 맡은 병사 6명의 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비서실장과 분대장을 동시에 겸했다고 보면 된다. 그의 내무실은 정보부대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정보부대장실 옆 조그마한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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