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이 전국 유일의 보훈·안보교육장으로 거듭나길"
상태바
"남해군이 전국 유일의 보훈·안보교육장으로 거듭나길"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9.01 14:55
  • 호수 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흔적 남기기 18화 서상길 월남전 참전유공자②
----------------------------------------------------
정보부대 사진병 수행, 은행업계 역사 써 내려가
참전 유공자의 흔적 남기기 주역으로 거듭나다

특별한 보직 사진병
 전속부관 겸 당번장 역할을 수행한 지도 3개월이 다 돼 가던 1971년 10월의 어느 날, 정보부대 소속 사진병이 귀국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서 유공자. 그는 "저는 당연히 정보부대장의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죠. 전속부관 역할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당번장 역할까지 하니 휴일도 없이 제 개인 시간이 부족하더라고요"라며 "마침, 사진병이 귀국하니 제가 사진병을 하고 싶다고 자원했죠. 고등학교 때 카메라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거든요"라고 말했다. 
 어차피 사진병은 필요한 보직이었기에 정보부대장의 허락 하에 정보부대 내 유일한 사진병이 된 서 유공자. 그는 기본적으로 정보부대장의 활동 모습을 담고, 특히 작전지역의 모습이나 베트콩 포로를 심문하고, 여러 크고 작은 회의에 참여해 그 모습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그의 사진은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서 정보교두보와 같은 역할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사진병을 수행한 점에 대해 서 유공자는 "다행히 사진병이라는 자리는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전장 현장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꽤 보람을 느꼈죠. 당시 촬영한 사진은 대부분이 흑백이었는데, 제가 촬영하고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확대까지 모두 혼자했죠"라며 "그래도 어디서 어떻게 적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고, 지뢰가 워낙 많았기에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늘 따라다녔죠"라고 회상했다.
 
알아볼 수 없는 동기의 마지막 모습
 귀국과 동시에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는데, 월남전에 함께 참전한 절친한 동기가 적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서 유공자는 "동기의 주검은 사지가 절단되고 온몸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습니다. 너무도 처참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분노가 차오릅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함께 한국 땅을 밟지 못한 동기의 마지막 모습을 뒤로한 채 1972년 8월 귀국과 동시에 제대를 명받았다. 그에게 남은 건 영광스러운 주월사령관 표창장과 부대 참전기장, 정보부대장으로부터 하사받은 시계였다.
 참고로, 귀국하면서 당시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흔적 남기기 전시장에는 사진병으로 복무하던 당시 사진 1장과 나트랑 해변에서 찍은 사진 1장이 전부다.
 서 유공자는 "전쟁은 너무도 비참해요"라며 "나트랑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라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이었지만 아이들은 배고파서 구걸하고 있고, 10대 여자아이들이 과부가 되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서상길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월남전 복무 당시 주월군사정보부대장으로부터 받은 시계와 참전 부대기장을 기증했다.
서상길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월남전 복무 당시 주월군사정보부대장으로부터 받은 시계와 참전 부대기장을 기증했다.

계속된 도전
 제대한 서 유공자는 곧바로 부산은행에 복직했고, 친구의 소개로 당시 국민은행에서 근무하던 이경숙(72) 씨를 만나 1975년 6월 22일 결혼에 성공한다. 다음 해인 아들 1명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실적을 높이던 그는 아들 출생과 함께 또 하나의 경사가 찾아온다. 당시 27세밖에 되지 않은 서 유공자가 부산은행 역사상 최연소 대리로 승진한 것. 그리고 1년 후인 1977년에는 재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부산은행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부산은행에서는 서 유공자를 더 성장시키기 위해 1981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미국 연수를 보냈고, 1986년 3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국내연수에 참여시키기기도 했다. 이러한 투자에 서 유공자는 보답하듯 한국금융연수원 연수에서 부산은행에서는 처음으로 우등상을 받은 기록을 세운다.
 각종 상과 기록을 세우며 초고속 승진으로 차장까지 올라간 서 유공자. 그는 "부산은행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곳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는데, 새로운 곳에서 도전하고 싶었어요"라며 "부산은행이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좋았지만 저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선택한 신생 동남은행. 신용분석사와 대출심사역, 당시에는 귀했던 자격증 2가지를 보유하고 있던 서 유공자는 자격증뿐만 아니라 그동안 보여줬던 이력과 경력을 인정받아 동남은행의 창립요원으로 참여했다.
 서 유공자는 동남은행 최초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해 이를 재무부에 제출해 1989년 11월 은행 인가를 받고, 점포개발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동남은행이 크고 작은 지역에 점포를 설립하기 위해 건물을 임대하거나 매매하는 등 중요한 역할이었다.
 서 유공자는 2년 동안 전국 50개 점포를 설립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91년 6월 자회사 동남리스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부장을 맡아 설립에 이르렀다. 이후 치열한 지점장 경쟁 속에서 부산의 지점장을 4번 맡았고, 본사에서도 2개의 부서장(지점장급)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또, 서 유공자는 은행에 복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부산공업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인쇄공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이후 1997년 6월 13일 48세의 나이로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의 은행원 생활은 마무리한다.
 이후 서 유공자는 두부제조업체의 전문경영인으로 15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남해에 반하다
 서 유공자는 "은행원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 시도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은 만큼 해봤다고 판단했어요. 3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도시 생활을 하면서 지치기도 했고요"라며 "그래서 새로운 곳에 귀촌하고 싶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여러 지역을 물색하다 2014년 6월 22일 결혼기념일에 여행 온 남해에 반해 귀촌을 결심하게 됐답니다"라고 밝혔다. 곧바로 집 계약을 추진했고, 남해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섬호마을에 터를 잡은 그는 "아름다운 자연은 물론이고, 저의 유년시절 집과 닮았더라고요. 대밭이 있고 기와에 우물, 텃밭까지요"라고 집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남해행을 결심한 이후 서 유공자는 남해를 오가며 부산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2017년 4월 섬호마을로 완전 전입을 했다. 2018년 1월 1일부터는 섬호마을 노인회장으로서 현재까지 마을에서도 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 가곡반에서도 우수 학생으로서 활동하고 있고, 웰다잉 강사·스마트폰 강사 특히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매년 위촉하는 남해군 유일의 방송통신피해 예방교육강사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흔적 남기기 주역으로
 2020년 남해군청 홈페이지를 보던 도중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와 관련된 사업을 접하게 된 서 유공자. 그는 "이 일이야 말로, 노후에 할 수 있는 정말 의미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라며 "곧바로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합격했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습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부터 현재까지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회 최준환 위원장과 함께 서 유공자는 사무국장으로서 기록원들과 함께 총 2661점(2022년 6월 기준) 전쟁 사료를 수집하는 대업적을 이룬다. 일일이 한 가정씩 찾아서 소유하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참전유공자들에게 허락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실감하면서 자료를 모으고 전쟁 사연을 기록한 덕에 지금의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서 유공자는 "참전유공자들을 처음 찾아뵈면 귀찮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꺼려하시는 분들도 많았죠. 그러나 계속해서 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진심이 통하면 다들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요"라며 "참전유공자들의 노후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아 안타까운 분들이 많아요.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유공자분들의 마지막 모습들이 이래서야 되겠나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흔적남기기 전시회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남녀노소 많은 인원이 방문하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서 유공자는 "남해에 계신 참전유공자들은 거의 다 만나서 자료를 수집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욕심 같아선 그분들의 영상을 남길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라며 "또, 지금은 공간이 협소해 모든 자료를 전시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해를 넘어 다른 지역의 자료들도 많아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니만큼, 전국 유일의 흔적 남기기 전용 전시관이 건립돼 참전 유공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후세들에게는 보훈·안보교육장으로서 자리 잡는 그날을 기대합니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