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무장공비 토벌, 강원도 동부 최전방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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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무장공비 토벌, 강원도 동부 최전방 수호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9.16 12:00
  • 호수 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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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9화 │ 송백열 6·25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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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면 노구마을 현 97세 최고령 어르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에 대한 국민들의 사회적 존경 부족"
지난 3일 송백열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3일 송백열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적의 포탄 속 참호는 그의 방어막이 되지 못했다. 전우들과 헤어지며 홀로 산과 들을 헤매기를 몇 차례, 지리산공비토벌작전과 동부 최전선에서 생사의 길목을 넘나들면서 생존한 송백열(宋百烈·97) 6·25전쟁 참전유공자는 "조상들이 나를 잘 돌봐주셨는지, 아니면 명이 길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겼는지 몰라요"라며 일화를 소개한다.
 100세가 다 돼가지만 그의 기억력과 상황 묘사 음성은 매우 또렷하다. 
 
미조면 노구마을 토박이
 송 유공자는 아버지 송도안, 어머니 최탐지 사이에서 1926년 5월 15일에 태어났고 밑으로는 남동생 1명과 여동생 1명을 두었다. 
 미조면 노구마을 토박이인 송 유공자의 유년시절에는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 동생들까지 한 지붕 아래 살며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특히 송 유공자가 9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하늘로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고 한다.
 송 유공자는 "배고프고 생활이 어려웠고, 사는 게 다 비슷했지요"라는 말로 당시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송 유공자의 유년시절은 일제강점기였기에 공출(供出: 일제가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39년부터 실시한 농산물 수탈정책)로 인해 일본인을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고, 초등학교는 간이학교라는 이름으로 2학년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또한, 당시 처녀는 일본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송 유공자는 20세가 되던 1946년 같은 마을의 정복심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정복심 씨의 나이는 16세, 그만큼 정복심 씨의 집에서도 딸을 일본에 약탈당하기 싫었다는 의미다. 
 
전쟁과 동시에 입대
 송 유공자가 24세가 되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국의 청년들은 군대로 가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송 유공자도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지만 아내와 슬하에는 2명의 자녀가 있었기에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송 유공자는 "당시 우리만 가정을 꾸리고 있던 게 아니고 일찍이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우리가 안 가면 나라가 적들한테 넘어가는 꼴인데, 입대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라고 말했다. 
 송 유공자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고 곧바로 입대했고 입대 날은 "정월 초한날"이라고 표현했기에 1951년 2월 6일로 추정된다. 
 송 유공자는 제주도 50연대 훈련소에서 추위와 배고픔, 힘든 훈련 삼중고를 겪으면서 3개월을 버텨냈다. 그가 받은 군번은 0693895.
 훈련소를 수료한 그의 첫 번째 자대는 지리산공비토벌대였다.
 
지리산공비토벌작전
공비들의 포위망에 죽을 고비 넘겨

 1950년 9월 15일부터 16일 이틀간 미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필두로 펼쳐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한군이 후퇴하며 국군·유엔군은 전세를 역전하기 이른다. 그러나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지에서 월북하지 못한 북한군은 지리산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에서는 지리산공비토벌작전(1950년 10월 4일~1956년 12월 31일)을 추진했고, 송 유공자도 지리산공비토벌대원으로서 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지리산에 있는 봉우리를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는지 몰라요. 올라가면 북한군이 교육장을 차려서 먹고 자고 생활했지요"라며 "우리도 포위를 하면서 공비들을 몰아내고 포로로 잡았지만, 국군도 포위를 당한 이가 여럿 있었죠"라고 기억했다.
 이어 "공비 추격에 나섰다가 우리 소대도 포위당한 적이 있었어요. 아마, 소대가 흩어졌던 것 같은데, 저는 혼자 떨어지게 됐죠"라며 "당시 칼빈소총(M1)을 사용했는데, 노리쇠 앞에 위치한 공이가 고장이 난 거예요. 숨을 고르면서 은폐를 했고, 정확한 거리는 모르지만 일정 부분 다가왔을 때 수류탄을 차례로 2개 던지고 산 밑으로 뛰었더니 쫓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라고 회상했다.
 
동부전선 속초 고성
뼈아픈 351고지 전투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된 지 3개월 정도 지난 후 송 유공자는 영문도 모른 채 여수에서 LCT(전차상륙정)를 타고 강원도 속초 자대를 옮기게 된다. 공비토벌과는 다른 전투였기에 1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전장에 투입됐다. 
 그는 15사단 38연대 소속으로 작전지역은 강원도 동부 최전방 속초시와 고성군이었다. 송 유공자는 "나무들이 전부 흉터투성이였지요. 총알이든 포탄이든 파편이 훑고 간 상처 입은 나무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신장 185cm에 가깝고 체격도 다부져서 전투에 반장으로 종종 투입돼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리산공비토벌작전할 때랑 다르게 최전방에 가니까 경계근무도 서야 되고 전투에 참전 안 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잠시였지요"라며 "작전 마치고 돌아오면 사흘마다 한 번씩 소환해서 전투나 작전에 투입시키곤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군을 지원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동부전선에 위협이 닥쳤고, 전투에 나가있던 송 유공자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중공군은 5명당 1명씩 총을 가졌고 나머지는 방망이를 들고 돌격하는 거예요"라며 "근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어찌나 무섭던지"라고 말이다.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마주한 송 유공자. 그는 "호에서 연사로 총을 쐈는데 적군도 당연히 반격을 했죠. 적 총알이 흙에 맞았는지 제 눈에 흙이 들어가는 바람에 앞을 볼 수가 없었죠"라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지금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송 유공자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면서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큰 부상 없이 현재까지 건강히 살아있다는 데에 대해 스스로도 감사해 하면서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송 유공자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뼈아픈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전투(1953년 6월 2일 ~1953년 7월 18일)`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곧 휴전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전투 당일에는 5분만 있으면 휴전되니까 들뜬 마음이 있었죠"라며 "근데 351고지 아군 전장에 포탄이 떨어졌고 길게 늘어진 한 참호당 50명이 몸을 담고 있었죠. 근데 포탄이 떨어지면서 수백 명이 전사했어요"라고 말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며 북한군의 승리로 끝났던 351고지전투로 인해 이전까지 남한의 영토였던 금강산까지 북한에 내주게 됐다.
 
휴전 이후 이어진 군 생활
 남북의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송 유공자는 군 생활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후방 지역으로 내려와 아직 가시지 않은 전쟁 분위기 속에서 훈련을 받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군 생활을 이어갔다. 
 송 유공자는 1954년 7월 24일 계급 하사로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그리웠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집에 오니까 동네 사람들이 저를 잡고 막 우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아버지도 꿈이라고 말했던 장면이 기억납니다"라고 회상했다. 
 
가치가 사라져 가는 참전유공자
사회적 존경 필요

 6·25전쟁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헌신했지만 그는 후배들에게, 혹은 후손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고 한다. 
 송 유공자는 "우리 전우들이 나라를 위해서 싸웠지만 돈 얼마 주는 거, 6·25날에 행사하는 거 말고는 가치가 없는 것 같아요. 군수나 행정에서 조금 챙겨준다지만, 일반 사람들이 6·25모자나 조끼 입고 가도 알아주기나 합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죠"라며 "다들 90세가 넘어서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존경이 부족한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요"라고 말하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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