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고지전투에서 생사의 길목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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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고지전투에서 생사의 길목을 넘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9.22 16:12
  • 호수 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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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20화 │ 조한선 6·25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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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창설요원, 인민군에 포위당해
남면 우형마을의 동수(洞首) 어르신

 "전쟁 중에 팔이나 손을 다치면 행운이에요. 근데 다리에 맞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죠. 다리를 다치면 혼자서 도망갈 수 없으니까, 총알이 오가고 포탄이 날아오는데 어떻게 부축해서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전우도 챙길 수 없는 이토록 잔인한 게 전쟁입니다."
 조한선(趙瀚煽·92) 6·25전쟁 참전유공자가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은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할 정도로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지난 20일 조한선 6·25 참전유공자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 유공자가 취재에 도움을 준 6·25&월남전 흔적남기기 사업 추진위원회 최준환 위원장과 서상길 사무국장과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 20일 조한선 6·25 참전유공자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 유공자가 취재에 도움을 준 6·25&월남전 흔적남기기 사업 추진위원회 최준환 위원장과 서상길 사무국장과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풍족했던 어린시절
 조 유공자는 조장민·윤영아 부부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남면 우형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조 유공자가 13세가 되던 해부터 살고 있는 보금자리이다. 조 유공자는 그나마 농사를 많이 짓는 부모님과 어른들 덕분에 마을에서 상대적으로는 풍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한선 6·25 참전유공자의 지갑에 있는 어머니 윤영아 씨의 증명사진이다. 197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조한선 6·25 참전유공자의 지갑에 있는 어머니 윤영아 씨의 증명사진이다. 197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조 유공자는 "우리 집에 논이 10마지기 넘게 있었고, 밭이 4마지기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다들 먹을 게 부족하고 못 사는 시절이었지만 그나마 우리 집은 괜찮았던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남명초등학교에 입학한 조 유공자는 "조선말을 쓰면 반장이 기록해서 선생님이 혼내고 그랬지요. 일본에다가 공출(供出: 일제가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39년부터 실시한 농수산물 수탈정책)을 핑계로 쌀을 많이 뺐겨서, 어디 사람 없고 어둑한 곳에다가 숨겨놓고 그랬어요. 쥐들이 쌀을 파먹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하교 후 아침, 저녁으로 소를 먹이기 위해 점심 먹고 망태를 짊어지고 풀을 캐고, 여물을 운반하는 그런 생활을 했었다. 그나마 좋았던 기억은 친구들과 놀 때였는데, 조 유공자는 "어릴 때 팽이치기하고 비석치기 하고 그나마 놀이하는 게 재밌었죠"라고 말했다.
 또, 조 유공자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를 앞두고 있던 때,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이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그의 생활은 부모님을 도와 농사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남면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 진학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 유공자는 "당시에는 장남이 가업을 이어 받아 농사를 짓고 집을 지켜야 하는 풍토가 있었다. 어차피 중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진학은 생각도 안 했다"고 밝혔다. 

부산도 가지 않고 속초로
 조 유공자가 19세가 되던 해, 인생의 큰 사건 두 가지가 일어나는데, 한 가지는 동갑인 최끝심(남면 항촌마을) 씨와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부산에 체류 중일 때 입대영장을 받게 된 것이다. 
 1년이 지난 1950년 조 유공자는 "아마 젊은 사람들은 전부 영장을 받았을 거예요. 영장 받고 다음 해에 평산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 동래구까지 갔죠"라며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냥 가라고 해서 갔는데, 도착한 곳이 연병장이었던 거죠"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날 도착한 장병들은 연병장에다가 1열 횡대로 세워서 하룻밤을 자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음 날에 제주도 3연대 훈련소에서 3주 정도 훈련을 받았죠"라며 "제주도 훈련소에서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요? 도둑질이에요. 시내에 가서 가마니 한 자루씩 갖고 오라고 교관들이 시키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훔쳐온 식량으로 밥을 먹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고 훔치지 못하면 배트(빠따)로 맞아야 하는 잔혹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급박한 상황인지라 제주도 훈련소를 다른 기수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부산항으로 갈 줄 알았던 조 유공자와 훈련병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조 유공자의 부모님이 부산에서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조 유공자와 훈련병들은 곧바로 동부전선 최전방 속초로 향하게 됐다.
 육군 제20사단 창설 요원이 된 조 유공자와 동기들은 황무지와 같은 곳에 죽대로 세운 기둥으로 어설프게 지은 막사가 있었다고 한다. 교육 이후 소속은 20사단 61연대 2대대 6중대. 군번은 9232401.
 조 유공자는 "저녁이 되면 또 시내로 도둑질 하러 가는 거예요. 너무 배고프니까"라며 "김치라도 하나 가지고 오면 다들 먹으려고 하니까 화장실에서 몰래 먹고 그랬지요"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조한선(왼쪽) 6·25 참전유공자의 지갑에 있는 하얀 옷을 곱게 입고 있는 아내(오른쪽)의 사진이다.
조한선(왼쪽) 6·25 참전유공자의 지갑에 있는 하얀 옷을 곱게 입고 있는 아내(오른쪽)의 사진이다.

M-1고지전투 적에게 포위당해
휴전 직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속초 주둔지에서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되기 위해 설악산으로 향하게 된 조 유공자의 대대. 2주 동안 경계 교육과 근무를 서면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준비를 했는데, 그곳이 바로 양구군에 위치한 M-1고지이다.
 어둑해지자 행군으로 이동하게 된 조 유공자의 부대. 어느 골짜기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밤새 걷고 또 걷고 산을 타고, 졸다가 절벽으로 떨어질 뻔한 병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날이 밝자 한 개울가에서 집결했고, 아침식사는 주먹밥 하나. 식사를 마치고 나니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 우리가 죽는구나."
 조 유공자를 비롯해 모든 소대원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는데, 조 유공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는 편지였다. 
 기쁨도 잠시 계속 고지를 향했다. 낮에는 미군의 비행기가 날아다니기 때문에 고지는 주로 국군이 점령했지만 밤이 되면 비행기가 날지 못해 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하는 형국이었다. 
 고지에 오르니 많은 호와 그 속에 있는 철모는 이미 구멍이 숱하게 뚫려 두려움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조 유공자의 중대가 포위당한 것. 고립된 상태에서 보급로도 끊기고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3일간 수리취 열매와 아침 이슬로만 허기를 달래야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3일을 버티고 나니 포위망이 풀렸고 인민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조 유공자는 "M-1고지에 1개월 정도 있었는데, 우리 대대에서 100명 넘는 1개 중대가 전사했어요. 겨우 40명도 안 되는 1개 소대만 살아남았어요"라며 "나중에 살아서 만난 다른 중대의 친한 친구와는 너무 반가워서 보듬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증언했다. 
 포위도 당하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전투에서 큰 부상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 유공자는 "우리 대대장이 제게 한 말이 있어요. `너는 귀가 커서 명이 길다`라고 하더라고요"라고 농담으로 얘기했지만, 생존을 위해 얼마만큼 모진 시간들을 견뎠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M-1고지전투 이후 다시 속초에 있는 설악산으로 복귀한 조 유공자의 대대는 2주 정도 경계 근무를 서는 동안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조 유공자는 이후 20사단에 훈련병들을 가르치는 교육대의 전술조교로서 근무를 계속 이어갔고 1956년이 돼서야 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명받을 수 있었다. 이후 조 유공자는 다시 고향 남면 우형마을로 돌아와 현재는 슬하에 2명의 아들을 두고 마을 동수(洞首)로서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지갑 속에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어머니와 아내가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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