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의 창작지,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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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의 창작지, 무엇이 문제인가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10.11 14:49
  • 호수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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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재 한국유배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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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문학상 시상식 및 문학축전과 남해문화재야행 축제를 맞이하면서
박  성  재한국유배문학연구소장
박 성 재
한국유배문학연구소장

 오는 10월 8일과 9일 양일간 남해읍 일대에서 유배를 주제로 한 대규모 축제 `남해문화재야행`과 9일에는 제13회 김만중문학상 시상식 및 문학축전이 열릴 예정이다. 특히 문화재야행 사업의 `유배` 주제는 전국에서 남해밖에 없고 독창적이어서 문화재청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주요 행사로, 유배천리 퍼레이드와 고품격 유배 토크콘서트 등과 함께 야외무대에서는 뮤지컬 〈김만중〉을 올린다고 한다. 
 필자는 `남해유배`라는 주제가 있는 `야행`과 `김만중문학상`이 남해군민과 향우님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참여로 성공적이고 지속이 가능한 남해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즉 가장 먼저 "구운몽의 창작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구운몽 창작지의 몇 가지 기초적인 물음과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 기본 전제에 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소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지금까지 쟁점이 되는 『구운몽』의 창작 과정과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구운몽』의 창작 동기를 살펴보면, 도암 이재(李縡)는 『삼관기』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서포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구운몽』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구운몽』은 1687년(숙종 13) 9월부터 이듬해 11월 사이에 김만중이 평안북도 선천(宣川) 적소에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문제는 지금까지 『구운몽』은 선천 적소에서 창작되었는가, 남해 적소에서 창작되었는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혀줄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전소설의 절대다수가 그러하듯 작자와 가까운 이들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전언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기에 필자는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구운몽』 창작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전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나와야만 논란이 종식될 듯하지만, 최근의 새로운 연구 성과, 즉 『주역(周易)』 복괘(復卦)와 몽괘(蒙卦)의 역리, 그리고 남해 유배지에서 창작된 김만중의 평론집 『서포만필』 하권과 『서포집』 소재 일화와 한시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지금 시점에서도 상당 수준 정리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김만중이 남해 유배 시절, 『서포만필』 하권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주역』의 수리에 대한 이치에 밝아 『구운몽』에 나타난 수들도 그렇게 착안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운몽의 창작지, 무엇이 문제인가? 그 답은 작자 미상의 『서포연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잣대로 활용할 수 있는, 즉 『구운몽』의 주해서라고 할 수 있는 『서포만필』 하권 기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① 지금까지도 쟁점이 되는 작자 미상의 『서포연보』 기사에서 시를 쓰면서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또,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夢幻)이라는 것이었으니"란 문구 중 `몽환`과 관련된 `저서(著書)`를 『구운몽』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김만중이 남해 적거 시절 `육화공(六化公)`에게 직접 답장하는 편지글에서는 
 
"신상(身上)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겨난 신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人生)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지난 가을 [형님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았던 일이 더욱 마음속에 또렷이 빛남을 깨닫습니다."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김만중이 만년 남해 적거 시절, 인생은 정말 꿈과 같이 허무한 것(人生眞是一夢)임을 편지글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그는 남해 적소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여러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하던 해(숙종 18년) 3월 육화공에 답장하는 편지글에서 이미 자신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예측한 글을 남기고 있다. 그러기에 그가 남해 적거 시절, 직접 쓴 편지글의 기사 내용, 즉 `실로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이렇게 김만중은 파란만장했던 한평생을 남해 적소에서 마치게 되니 그것을 `한바탕 꿈`의 기사라고 본다면 그 의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지금까지 『구운몽』의 창작 연대는 『남정기』의 창작 연대를 도외시하고는 규정짓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 연구자는 『구운몽』의 연대 고증을 독립적으로 오직 도암 이재의 『삼관기』나 작자 미상의 『서포연보』를 바탕으로 구명하였다.
 
 ② 이러한 문제는 서포소설의 창작 과정과 사상적 배경을 논증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두 작품을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점은 김만중이 만년 유배지에서 창작된 서포소설의 전후를 따진다면, 『사씨남정기』가 『구운몽』보다 먼저 저작되었다 함은 『서포만필』의 기사 내용과 그 당시 김만중의 개인적 상황과 역사적 사회상으로나 소설의 내용상으로 봐서 부정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강옥 교수가 언급했듯이 『구운몽』은 세속적 삶 자체를 반성하여 세속적 삶의 의의나 가치를 성찰하고 마침내 그것까지 초월하고자 한 것이다. 작자 개인사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사씨남정기』가 세속적 삶이 활력 있게 진행되는 시점이나 혹은 그런 상태를 인정하는 시점에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구운몽』보다 선행한다고 하겠다. 『구운몽』은 세속적 삶이 마무리 되어가면서 그것을 전체로 조망할 수 있는 단계에서 창작되었다."
 
 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작자가 남해 유배지에서 이념과 관련지어 두 소설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명백한 논거를 보면, 김만중이 말년 남해 유배지에서, 서포소설 창작 과정과 배경에서 『사씨남정기』를 먼저 저작했고, 그 후작으로 『구운몽』이 지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③ 이원수 교수가 발표한 논문 「『사씨남정기』의 창작 동기 및 시기」에서 토론을 맡았던 이상구도 질의와 답변에서 
 
"『사씨남정기』에는 당대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작가의 의식이나 희망이 반영되어 있는 반면에, 『구운몽』에는 현실적인 삶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삶을 지향하는 작가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젊은 시절에는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나 욕망이 강하다면, 노년에는 탈속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포가 『사씨남정기』보다 먼저 『구운몽』을 지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즉 그 당시 극한의 남해 적거 시절, 사회적 정황과 작자 개인사와 가문으로 본다면 『남정기』는 완전히 목적소설로서 숙종의 성심을 회오하게 하여(`爲仁顯王后閔氏巽位欲悟聖心) 인현왕후의 재기로 서인파의 정권을 회복함과 동시에 자신의 지위 만회를 위하여 먼저 저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④ 이를 김무조 박사는 "『구운몽』이 선천 시대의 작품이 아닌 것은 겨우 일차의 정배생활에서 모든 것을 한갓 꿈에 돌려버릴 서포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 후 숙종 14년의 방환은 서포에겐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했으나 다시 적중의 몸이 되고 보니, 최후의 수단으로 시도된 것이 목적소설 『사씨남정기』요, 이것마저 수포화된 마당에 인생의 마지막 한 고비 노염을 다하여 혈루지심에 감행한 대작이 『구운몽』이라고 말하면서, 또 이처럼  양 작품의 내용이나 표현으로 봐서 『남정기』보다는 『구운몽』이 후작인 것이 절대성을 가진다면, 서포모당이 숙종 15년 기사(己巳) 12월 22일에 운명했으니 『구운몽』은 숙종 15년 모당의 유명을 전후하여 남해 적중작이 틀림없을 것이고 『남정기』도 역시 동철에 놓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논란이 되고 있는 『구운몽』의 창작지는 희망이 있었던 2차 선천 유배지라고 할 수 없으며, 김만중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할 길이 전혀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창작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남해 적거 시절이었다. 즉 북한 선천은 희망이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면, 남해 시절은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서포 김만중 선생은 남해로 유배된 수많은 유배 인물 중에서도 대표 유배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관료이며, 먼저 정치가의 관점에서 『사씨남정기』와 그 후작으로 작가의 처지에서 세계 명작 『구운몽』 작품을 남해 유배지에서 창작한 문인이다. 
 현재까지도 일부 연구자들은 『사씨남정기』가 『구운몽』보다 후작이라고 인식하지만, 반대로 『사씨남정기』가 『구운몽』보다 이전에 저술된 목적소설이라는 것을 작품의 내용에서나, 또 역사적 사실에서도 판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보물섬 남해가 우리에게 `남해유배문학관`과 `노도 문학의 섬`을 큰 선물로 풀어 놓았다. 이 선물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빈틈없이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남해유배문학관 개관식 때부터 그 준비의 목적으로 남해군의 캐치프레이즈로 `인문학의 메카 `구운몽`의 수도 남해`를 대표 간판으로 달 것과 또 서포 선생 추모제 봉행, 전국규모의 `서포문화제` 개최, 적극적인 관광유배문화 홍보 등을 남해군의회와 행정당국에 제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김만중 선생의 인문학적 창조 능력으로 말년 남해 유배 시절, 창작한 세계 명작 『구운몽』은 미래 인문학 콘텐츠 개발 자료로서의 고소설 활용방안으로 사용될 남해군의 무한자산으로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행사가 남해군의 유배문화자원, 즉 서포 김만중 선생과 소설 『구운몽』의 창작지 남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보물섬 남해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자원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남해군민과 향우님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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