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고 돕고 서로 돌보는 상부상조의 삶, 마을 곳곳에 스며있어
상태바
아끼고 돕고 서로 돌보는 상부상조의 삶, 마을 곳곳에 스며있어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2.11.14 14:14
  • 호수 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탐구생활 1 | 서면 서호마을 이야기

남해군은 올해 8월 남해군마을공동체지원센터 주관으로 11개 마을에 대한 마을자원조사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마을자원조사는 마을별 고유특성과 다양성에 기반해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를 위한 기초적인 활동이다. 본지는 이 마을자원조사 과정에 참여해 마을공동체지원센터와 공동으로 마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발굴해 소개하려고 한다. `마을탐구생활`이라는 제호로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서면 서호마을의 마을회관 이야기다.
〈편집자 주〉

 서면 서호마을(이장 김구영)은 주민 140명이 산다. 평균연령이 80세로 고령의 마을주민들이 오랫동안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장수마을이다. 마을 뒤(북쪽)로는 망운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강청산과 우측(서북쪽)으로 새장터(옛날 활을 쏘던 곳), 남쪽 앞에는 남산(천황산 자락)을 마주하는 남향의 따뜻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옛날부터 산림이 풍성하여 땔감이 풍부하고 들이 넓고 물이 좋아 농사짓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을 둘러싼 좋은 산림자원과 남향의 넓고 비옥한 들판을 활용해 8만여㎡의 친환경 유기농업단지가 조성돼 있으며, 친환경작물(시금치, 벼)이 주민 대부분의 주요 경제 소득원이 되고 있다.  
 서호마을은 현재의 서상에서 동정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고 염전이 있다 하여 `홀개` 또는 `호흘포`, `홀포`로 불렸고 마을 서쪽에 기와공장이 있어 `와야동` 또는 `애애동`으로 불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명인 `서호리`로 확정됐다. 

서면 서호마을회관 본채 `호운각` 앞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김구영(맨 뒤 오른쪽) 이장이 마을회관의 유래를 들려주고 기념촬영을 했다.

70년 된 서호마을회관
마을의 정신을 간직하다

 서호마을 초입에는 수령 50년 된 느티나무와 전통 한옥 형태의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어 남다른 경관을 자랑한다. 본채는 회의실과 사랑방으로, 아래채는 부녀회사랑방과 회의실로 이뤄져 있다. 마을회관의 공식 명칭은 `호운각`(湖雲閣)이다. 마을출신 유영남 박사가 이름을 짓고 당시 도지사였던 김두관 국회의원이 직접 써준 글씨를 삼동면 서각가가 새겨 현판을 걸었다.  
 이 마을회관은 약 66년 전인 1956년에 완공된 건물로 마을 산에서 자란 원목과 마을 목수들이 3년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산림법이 엄했어요. 돈이 없어 목재를 살 리는 없고 마을 인근 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회관을 짓다 보니 잡혀간 분도 계셨다 해요." 김구영 이장의 말이다. 
 당국에 붙들려 가는 고초를 무릅쓰고 벤 생나무는 1년을 그대로 산에 묵혀 말려뒀다가 마을까지 일일이 메고 날라서 3년에 걸쳐 마을회관을 지었다고 한다. 6·25전쟁과 휴전을 겪는 통에 20대 젊은이들이 죄다 입대한 터라 이 일은 30대 이상 장년층과 어린 10대 소년들의 몫이었다고. 김도진(83) 어르신은 "내가 열일곱 살 때쯤 일이에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해야 했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목도(무거운 물건이나 돌을 밧줄로 얽어 어깨에 메고 옮기는 일 또는 목도하는 나무 채)를 멨지요." 
 이렇게 주민들의 땀과 노동으로 남해군 유일의 유려한 한옥 마을회관이 탄생했다. 회관 초입 멀찍한 곳에는 커다란 돌을 목도로 메고 운반해 와서 초비를 세웠다. "당시 목수들을 비롯해 마을회관을 짓는 데 공헌한 어른들이 많았어요. 이장 할아버지가 그 공적을 돌에 새기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기술이 있든 없든 동네사람이 전부 같이 노력봉사해서 지은 거거든. 당시에는 상관없지만 나중에 후손들이 보면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왜 빠져 있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공로자들의 이름을 새기지 않기로 했지요." 나중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마을 어른들의 `지혜로운 처사`였다고 하겠다. 

보리 한 되씩 담아 상갓집 전했던 시절
 이 마을회관에는 건물의 준공과 함께 시작된 귀중한 마을기록물과 유물이 남아있다. `수모상부기`(收牟相賻記)와 `미모상부계`(米牟相賻契)라는 마을 부의금 장부와 되(됫박)이다. 이 장부는 회관 준공 2년 후인 1958년(무술년) 2월 8일부터 시작돼 2022년 3월 13일까지 314회 기록됐다. 되에는 `무술년 4월 8일 서호마을 전용`이라는 한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집집마다 초상보리 한 되씩을 걷어 상갓집에 건네주면 상갓집에서는 이것으로 떡과 밥을 해결했다고 한다. 기록지에 달린 도장을 쌀과 보리를 낸 사람 이름 아래 찍어두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1984년부터는 보리가 쌀로, 2019년부터는 현금(3천원)으로 변했지만, 이 상부계와 되는 여전히 마을 상부상조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외에도 회관 안에는 마을방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마을 회의와 연락을 담당해온 종, 이제는 1년에 한 차례 동제 때만 사용되는 병풍이 남아있다. 이 병풍의 첫 폭에는 `서호부락 공자탄강 2491년 경진년(1940년) 3월 혼례식용 병풍`이라 기록돼 있다. 일설로는, 300년 전쯤 신원 미상의 나그네가 마을주민이 적은 글을 병풍에 그려준 뒤부터 마을에서 보존해왔다고 한다. 
 동제와는 별도로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마을회관에서 마을화합잔치를 연다. 반별대항으로 윷놀이, 제기차기, 석사놀이 등을 통해 주민 화합을 도모한다. 
 이렇듯 삶의 지혜를 품고 상부상조하며 대대손손 이어져온 장수마을 서면 서호마을. 그 주민들이 땀흘려 세운 마을회관은 마을 정신을 지키며 오늘도 주민과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