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두 "흔적남기기는 영원히 기록되는 중요한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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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두 "흔적남기기는 영원히 기록되는 중요한 사업"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12.23 16:15
  • 호수 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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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22화 │ 우봉두 월남전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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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흔적남기기 관련 3회나 남해군 방문
법정까지 간 장애 인증사진 기록 덕분 승소
"전시관 지어지면 무슨 일이든 일조하고 싶다"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전시회가 한창인 가운데 올해 흔적남기기 전시회를 위해 서울에서 남해군을 세 번이나 방문한 유공자가 있다. 그만큼 전쟁의 흔적과 기록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흔적남기기 사업에 많은 협조를 보이며 진심을 표한 인물이다. 
 우봉두(77)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지난 10일 올해 마지막 남해유배문학관을 방문했다. 그가 가진 두꺼운 종이들과 사진 등 자료만큼 사연이 많은 유공자이다. 
 우봉두 유공자는 "월남전을 비롯해 6·25전쟁 참전유공자 선배들의 물품들이 이렇게나 많은 곳은 처음 봤다.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며 "저도 군대에서는 기록을 남긴 흔적들이 꽤 있어서, 제가 들고 있는 것보다 이렇게 전시할 수 있고 전문적으로 관리를 받는다면 그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물품들을 기증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늘은 아내(이예분 씨)와 남해에 왔다. 저번에 남해에 왔을 때 다 못 봐서 오늘은 관광차원에서 방문했다"며 "그래도 흔적남기기 전시회를 빼놓을 수 없어 또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진 15매, 전역증 수첩 1권, 추억록 1권, 자작앨범 1권, 참전기장·기장수여증 1개, 위문편지 다수, 행정심판근거자료 일체 등 많은 자료를 기증했다.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우봉두(왼쪽에서 세 번째)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지난 10일 아내 이예분 씨와 함께 남해유배문학관을 방문했다. 우 유공자가 최준환(오른쪽)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장과 서상길(왼쪽) 사무국장에게 물품들을 기증하는 모습이다.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우봉두(왼쪽에서 세 번째)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지난 10일 아내 이예분 씨와 함께 남해유배문학관을 방문했다. 우 유공자가 최준환(오른쪽)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추진위원장과 서상길(왼쪽) 사무국장에게 물품들을 기증하는 모습이다.

전역 후에도 계속된 월남전 후유증
 전북 장수군에서 태어난 우봉두 유공자는 22세가 되던 해 3월 15일, 육군으로 입대했으며 포병주특기(155mm)를 받으며 육군 28사단(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서 자대생활을 지냈다. 군번은 11875270이다. 우 유공자는 어차피 계속해야 하는 군 생활, 가난했던 가정형편 등 복합적인 상황에서 파월을 결심하게 됐다. 
 우 유공자는 다른 육군 병사와 마찬가지로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에서 훈련을 마치고, 1969년 9월 27일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부산항으로 향한 날이다. 이후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베트남 나트랑에 도착했다. 베트남에서 자대는 뚜이호아 지역에 있던 백마부대 28연대 966포병대대로 받게 됐다. 
 특히 그는 작전 수행 중에 크고 긴 포신을 다루다 손을 다쳤는데, 오른쪽 약지(네 번째 손가락)가 골절된 것. 당시 베트남에는 수술할 방법이 없어 약식으로 부목에 의지한 채 계속 군 생활을 이어갔다. 

우봉두 유공자가 월남전에 참전했을 당시 155mm 포신을 다루다가 손가락이 휜 상태로 찍은 사진과 현재 손가락을 비교해주고 있다.
우봉두 유공자가 월남전에 참전했을 당시 155mm 포신을 다루다가 손가락이 휜 상태로 찍은 사진과 현재 손가락을 비교해주고 있다.

 우 유공자는 "손을 다쳤을 당시에는 아렸는데 시간이 지나니 통증이 밀려왔다. 젊었을 때는 정말 많이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큰 지장이 없다"고 해탈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50여년을 손가락이 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우 유공자는 전역 이후 장애등급을 받기 위해 시도했지만, 월남전 당시에 다친 게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우 유공자는 결국 행정심판을 준비했고 변호사도 없이 홀로 보훈단체와 기관 등을 다니며 입증자료를 만들어 결국 승소했다. 그 중 월남전 당시 찍은 사진 하나가 결정적이었는데, 그 사진 속에서 손가락이 골절된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7급 장애를 인정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우 유공자는 155mm 대형포를 발포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특히 전쟁터에서는 하루에 80kg에 육박하는 포탄을 120발씩 쏘는 일도 잦았다. 그만큼 청력도 손상을 입어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상태로 전역을 했다. 이 또한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도 없이 7년이라는 긴 소송 끝에 승소해 6급 장애를 인정받았다. 
 그렇게 그는 월남전에서는 베트콩과 싸웠고, 전역 후에도 전쟁 후유증으로 얻은 장애를 입증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해온 것이다.
 지금은 슬하에 아들 1명, 딸 3명을 두고 서울에서 도배를 비롯해 환경정화나 청소봉사 등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우 유공자. 그는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후세들이 이러한 전쟁이 휘말려서는 안 된다"며 "그런 점에서 제 흔적들이 기여할 수 있다면 감사하다. 지금은 전시회에 그치지만 흔적남기기 전시관(가칭)이 지어지면 꼭 불러 달라. 어떤 일이든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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