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의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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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의 짝사랑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2.13 11:14
  • 호수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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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로 읽는 남해군정(南海郡情) │ 서관호 시조시인·칼럼니스트
서  관  호시조시인·칼럼니스트
서 관 호
시조시인·칼럼니스트

 2001년 11월 1일부터 2개월간 저는 남해초등학교 교단에 섰습니다. 
 저는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69년 3월부터 10년간 사천, 진주에서 교직에 있었고, 1979년 2월부터 20년간 LH공사에 근무했으며, 2년 남짓 아버지 병수발을 하다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집에 왔습니다. 때마침 기간제 교사 자리가 있어서 미리 신청을 해두고 왔었고, 담임도 6학년이라 좋았습니다. 
 이때를 추억하면 지금도 가슴 따뜻해져오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남해인의 정체성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첫 시간에 `남해 3자`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비자를 아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퇴근길에 난음리에 들러 비자나무 한 가지와 비자 한 움큼을 얻어왔습니다. 교실에 전시하고는 "난음리의 비자림은 이곳이 현읍지(縣邑地)였을 적에 조성된, 오늘날로 치면 정유공장과도 같은 것"이라 알려주었습니다. 등화유뿐만 아니라 식용, 약용, 미용, 목재의 용도 등은 물론 전국의 비자림까지 다 알려주자 아이들은 한 아름의 지식은 물론, 내 고장의 역사와 기릴 것까지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내친김에 `우리가 진정한 남해인이 되는 길`을 적어내라 하였습니다. 전교 어린이회장이던 장예슬이는 `우리 것을 지킨다, 이름을 빛낸다` 등이었고, 하선진이는 `공부 열심히 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 등이었습니다. 아무렴 모두가 정답이었죠. 그네들이 지금은 어엿한 청년으로서 나라를 짊어지고 가고 있을 터이고, 남해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즐겁고 흐뭇합니다.   
 
 또, 하나는 고향을 확실히 새기는 기회였습니다. 저는 창선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 남해읍에 간 것은 웅변대회 두어 번, 4H클럽 회의에 몇 번 참가한 게 전부였습니다. 세월은 흘러 1981년, 자동차를 갖게 된 다음부터는 부산으로 가려면 단항에서 도선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불편함과 기다리는 시간 등으로 차라리 남해대교를 이용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이따금 시간이 여유 있을 때는 집을 나서 지족에서 좌회전하여 아침햇살에 윤슬이 눈부신 물미도로를 지나 미조항과 상주포구, 앵강만, 가천 다랭이마을, 갈화와 차면을 돌아가면 노을 지는 여수만, 광양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암 선생의 화전별곡을 연신 읊곤 했습니다. 
 이렇게 스쳐만 가던 고향이었는데, 이제는 그곳을 맘껏 누릴 기회가 왔던가 봐요. 토요일이면 해안도로를 일주하게 되었고, 그 옛날 스쳐가며 담아뒀던 감동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그러한 감동들을 저에게 이미 준비되어 있던 시조라는 가락에 사려 담게 되었습니다. 이때 고향이 제게 준 선물은 시조 6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쓸 수많은 심상들을 쟁이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교단으로 다시 돌아온 일이었습니다. 당시 남해초등학교에는 박종원 교장, 공삼식 교감이 모두 한 해 선배로서 저를 따뜻이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지가 많은 경북과 전남에 교원임용시험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기왕이면 정식으로 함께 근무하자고 격려하며 시험 치러 가라고 동문들이 차비까지 갹출해주었으니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하리까.        
 제가 교단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이처럼 선후배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도 하거니와 당시 동학년이던 김점중, 하남칠 등 후배들의 교육력에 힘입은 바도 큽니다. 어느 날, 유소년 축구대회를 앞두고 군내 학교 대항전으로 연습경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선생님들의 지도력에 감동하였고, 나도 지금까지 사회에서 얻은 여러 경험들을 교단에다 풀어놓으면 못지않은 교육자가 되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02년 3월, 경주시에서 교단으로 복귀하였고, 가자마자 동해바다의 낮선 정경과 또 다른 위용이 시조라는 그릇에 담겨져 4편의 시조가 완성되었습니다. 남해에서 썼던 시조와 함께 10편을 묶어서 서울에 보냈지요. 5월 말, 학생들을 인솔하여 월성원자력문화재단이 제공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시인이 되셨습니다"라는 통지였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고향이 준 선물이기도 하고, 교단에 돌아온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짧은 두 달간의 고향에 대한 짝사랑은 저의 인생을 전혀 다른 길로 바꿔놓는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이후 9년간 경주, 부산, 양산을 오가며 여러 세상을 경험하였고, 문인으로서도 남해시대 신문에 칼럼을 써서 2권의 칼럼집을 펴냈고, 시조집『남해도』동시조집『바다가 있는 풍경』등을 펴냈습니다. 경주에서도 <천마총>, <서라벌 눈 오는 날>, <감은사지> 등으로 공무원문예대전에 입상하였고, 수많은 시조와 칼럼으로 경주를 빛냈으며, `시와 꽃과 사람`이라는 문학축전도 개최하였고, 원자력문화재단으로부터 서라벌문학상 시조부문을 신설하는 데 조력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서 유사 이래 최초인 어린이시조문예지《어린이시조나라》까지 창간하여 14년차에 이르고 중국과 미국에도 시조를 퍼뜨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새봄에도 남해 땅에 꽃씨 한 톨을 뿌리고, 티끌 하나를 주워볼까 합니다. 반듯한 세상을 꿈꾸는 한 선배님이 계셔서 더 많이 함께하며 더 좋은 추억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짝사랑이 참사랑이 되는 체험을 더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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