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쉬운 작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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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쉬운 작명법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4.21 11:57
  • 호수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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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이현숙 칼럼니스트
이  현  숙칼럼니스트
이 현 숙
칼럼니스트

 몇 해 전 화창한 봄날, 춘흥(春興)에 겨워 남편과 함께 계획에도 없던 드라이브를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도착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거리 풍경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이유인즉슨 올망졸망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건물에 내걸린 간판 때문이다. 
 건재상, 교회, 국밥, 노인복지센터, 농산물유통센터, 농약사, 농협, 농협자재센터, 다방, 떡 방앗간, 마트, 보건지소, 부동산, 석재상, 성당, 시장, 아구찜, 약국, 우체국, 의원, 주민복지센터, 중학교, 청소년센터, 초등학교, 한의원, 행정복지센터 등 시야에 들어오는 간판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 듯 `서포`라는 두 글자가 콕콕 박혀 있으니 왠지 별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누가 `서포` 마을 아니랄까 봐서.
 간판은 기관, 기업, 영업소, 상점의 성격과 특징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한 마디로 해당 기관이나 영업장의 얼굴 격이다. 그래서 상호를 지을 때는 다들 머리를 쥐어짜고 자체 해결이 정 안 되면 작명가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서포 거리의 간판에서는 그런 고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관공서나 초·중학교는 그렇다 쳐도 영업점의 간판 이름이 어찌 그리 일사분란한가. 행정 본위의 발상인지 주민들의 자발적인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아마도 간판 이름 짓기인 듯했다.

 아무려나 서포 사람들의 배포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야말로 `간판 작명의 끝판왕`이다. 간판 이름 하나로 지역을 평정한 예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포 말고 더 있을까 싶어서다. 참고로 옥외 광고물 관리법에 따라 규정에 어긋난 불법 간판은 강제 철거되는데, 간판 이름을 통일하는 것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 
 국내외를 통틀어 한 지역이 하나의 간판 이름을 공유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 봤다. 그러나 지붕이나 벽체의 색깔, 건축 소재를 통일한 해외 유명 관광지는 낯설지 않다. 예를 들면 `에게`해에 면해 있는 그리스의 섬 `산토리니`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하얀 벽에 파란 지붕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 또한 빨간 지붕으로 뒤덮인 마을 풍경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끈다. 국내에서는 전라도 신안의 한 작은 섬마을이 섬 구석구석을 보랏빛으로 곱게 단장한 뒤 `퍼플섬`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서포를 방문한 그날은 벚꽃이 흐드러지다 못해 이미 낙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때마침 건듯건듯 불어 대는 춘사월 봄바람에 벚나무 가지가 낭창낭창 흔들리고, 그때마다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꽃잎들이 꽃비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간판의 잔상이 뇌리에 남아서인지 그 작고 여린 꽃잎마다 `서포`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왕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이미지를 자처한 바에는, `서포`보다 `별주부`로 통일했더라면 지역 마케팅에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포 마을의 간판 작명에 버금가는 세상 싱거운 성씨 작명도 있다.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세계 최다 성씨 보유국인 일본의 성씨 유래에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역사적 변곡점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곳곳에서 대변혁을 초래했다.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발점인 셈이다. 그중 하나로 이때까지 성씨가 없는 일반국민들에게 창씨(創氏)를 명령하면서 에도시대에 3만 개였던 성씨는 메이지시대에 12만 개로 늘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田, 木, 野, 山, 橋, 川 (밭, 나무, 들, 산, 다리, 강)` 등 출생 장소나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한자들이 성씨에 많이 반영되었다. `다나카, 스즈키, 우에노, 야마모토, 다카하시, 호소가와` 같은 성씨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리고 장남, 차남, 삼남이 태어나면 별 고민 없이 `타로, 지로, 사브로`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 식으로 하면 `일남, 이남, 삼남`이다.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 이혼하면 결혼 전 성씨로 되돌아간다. 미국인들의 경우에도 선조들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가 성씨에 녹아 있다. `스미스(대장장이), 베이커(제빵사), 테일러(재봉사), 피셔(어부), 카터(짐마차꾼), 파머(농부)`가 한 예다.
 올해가 마침 토끼해인 데다가 월초만 해도 한창이던 꽃이 어느새 죄다 낙화한 벚나무를 보니 별주부전의 전설이 서린 그곳에서의 짧은 추억이 불쑥 뇌리에 떠오른다. 조붓한 거리의 간판들이 `서포`로 도배된 마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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