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아계실 이순신 장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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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아계실 이순신 장군(上)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5.08 17:14
  • 호수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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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서관호 시조시인
서  관  호시조시인
서 관 호
시조시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478년 전인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셨다. 탄신일을 맞이하여 장군의 전몰지에 사는 우리 남해인들은 장군의 업적을 다시 새김으로써 공의 인품을 흠모하고, 공의 충정을 본받으며, 공의 공적을 찬탄하는 순국성지의 더 떳떳한 주인이었으면 한다. 
 
1. 이름 순신(舜臣)과 자 여해(汝諧) 
 아버지는 아들 넷의 이름을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라 지었다. 중국에서 태평성세를 말하는 요순(堯舜)시대 전후의 추앙받는 인물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이름을 따와 순서대로 붙였다. 그러니까 순신은 순임금의 신하되어 태평성세를 이룩하는 큰 역할을 하라는 뜻이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여해(汝諧)인데, 순임금이 여러 신하 중에서 우임금을 불러 `오직 너(汝)라야 세상이 화평케(諧) 되리라` 하였다는 서경(書經)의 고사를 따서 지었다 한다. 나중에 그의 이름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화평케 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의 우람한 장래를 이름에 담았으니 `꿈은 이루어진다`는 지극한 소망이 어찌 실현되지 않으랴! 
 
2. 서애 류성룡과의 인연
 영의정이 된 류성룡(1542 ~ 1607)은 이순신과 어릴 적 이웃 마을에서 함께 자란 선배이자 친구로서 공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왜의 침략이 예견되는 시점에서 전라좌수사에 천거하였고, 공은 천거인의 기대를 능가하여 보답하였다. 류성룡은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임을 알아차린 인물이라 하겠다. 
 류성룡은 전시 최고 군직인 도체찰사로서 전장을 두루 살펴보았고, 물러난 후에 징비록(懲毖錄)을 써서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징비`는 시경(詩經)에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3. 정직과 공정의 화신
 1579년(35세)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있을 때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그의 친척을 참군(정7품)으로 승진시키려고 인사압력을 가했다. 이에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시키면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니 공정하지 못합니다"하고 거절하였다.
 - 1580년(36세) 7월 발포 만호(종4품)로 승진되었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객사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할 때 "이것은 나라의 물건이라 사사로이 쓸 수 없는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 1582년(38세)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후 활쏘기를 연마하고 있던 중 병조판서 류진이 이순신의 화살통을 달라고 하였다. "이까짓 화살통 하나쯤 드리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이것 하나 때문에 더러운 이름을 얻는다면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기가 찬 말에 "그대 말이 옳다"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이순신이 훌륭한 인재임을 듣고 만나보기를 청했고, 류성룡도 파직된 처지를 고려하여 이를 권했으나 공은 "그가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에는 옳지 못한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 덕수 이씨 4세로부터 이순신(1545~1598)은 12세, 이율곡(1536~1584)은 13세손이다. 

4.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
 - 1582년(38세) 발포만호로 있을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무기점검관)으로 발포에 왔다. 무기가 잘 정비돼 있었지만 허위보고를 올려 만호를 파직시켰다. 3년 전 그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 후 훈련원 봉사(종8품)로 복직되었으니 무려 8등급이나 강등되었다. 
 - 1586년(42세) 조산보 만호(종4품)로 승진, 이듬해 녹둔도 둔전관(군량미 생산 책임자) 겸임. 여진족의 침략이 잦으므로 함경병사 이 일에게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여진족 기병 1000여 기의 공격을 격퇴하고 포로 60여 명을 구출하였음에도 이 일은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아군의 피해만을 적은 거짓 장계를 올렸다. 왕은 공에게 백의종군을 명령하였다. 이듬해 여진족 거점인 시전부락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에서 벗어났다.
 - 1597(정유)년(53세) 원 균과 서인의 모함에다 왜국 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속은 선조는 공에게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고 잡지 않은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빼앗고 죄에 빠뜨린 죄 등을 물어 벼슬을 거둔 뒤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장경달, 이원익, 정 탁 등의 목숨을 건 상소를 받아들여 백의종군에 처하였다. 
 
5. 지극한 효성과 어머니의 별세
 아버지 이 정(李貞)은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기울었다. 이순신이 16세 때 어머니 초계 변씨의 친정인 아산으로 이주하여 외가의 도움으로 살았다. 공은 등과 후 삼남이면서도 어머니를 모셨고, 돌아가신 맏형의 식솔인 조카들까지 건사하였다. 맏형 회신의 4남 이완은 19살 때부터 전장에 데리고 다녔으며 아들 회와 함께 순국의 순간을 지킨 조카이다. 공이 얼마나 지극한 효자였는지는 난중일기에 구구절절이 기록되어 있으며, 어머니는 아들의 구금소식을 듣고 상경하다가 배안에서 향년 85세로 객사하셨다. 공은 백의종군 길에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빈소에서 하직인사를 하였으니 그 애통함을 말로 다하랴.
 
6. 스스로 모여든 장수들과 장졸들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군비, 치열한 훈련, 완벽한 전술 등으로 아군이 전사하거나 전함이 파괴되는 일이 거의 없이 전승을 거듭하게 되자 각처에서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에 있으면 다른 전장에 끌려가서 죽을 수 있지만 장군님 휘하에 들어가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술을 가진 장수들도 좌수사 곁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서른 살이나 많은 부하 정 걸 장군, 물귀신의 눈을 가진 어영담 장군, 화약은 내게 맡겨라 이봉수 장군, 정철총통을 만든 정사준 장군 등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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