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아계실 이순신 장군 - 下
상태바
영원히 살아계실 이순신 장군 - 下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5.12 10:18
  • 호수 8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 서관호 시조시인
서  관  호시조시인
서 관 호
시조시인

<지난 호에 이어>
 
7. 임금에게 사과 받은 유일한 신하 
 임금의 말은 곧 법이었고, 어느 나라 왕이라도 백성에게 잘못을 인정한 사례는 있었으나 신하 개인에게 사과를 하는 일은 없었다.
 1597년(정유), 이순신을 내쫓고 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함선과 군사를 모두 잃고 수군이 괴멸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는 교지를 내렸다.
 
 "-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죄인의 이름을 쓴 채 백의종군케 했던 것은 역시 사람의 지모가 밝지 못한데서 생긴 일이요. 그래서 오늘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요, 무슨 할 말이 있으리요."(-`기복수직교지` 부분)
 * 기복수직교지(起復授職敎旨) - 부모상을 당한 사람에게 직책을 준다는 왕명 
 
 이는 완곡한 것 같지만 왕으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중첩어로써 거듭 사과하는 기록을 남겼으니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공에게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만 다시 주었고, 정헌대부(정2품상)의 품계는 돌려주지 아니하였다. 이후, 명량해전에서 불과 13척의 배로써 133척의 대적을 무찌른 대승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경리 양호의 독촉도 무시한 채 포상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8. 무패, 무재해의 신화 
 1차 출정 옥포해전 3차 접전 42척 파괴, 아군 피해 부상 1명. 2차 출정 사천해전 등 4차 접전 72척 파괴, 아군 전사 13명, 부상 34명. 3차 출정 한산대첩 아군 피해 전사 19명, 부상 115명. 4차 출정 부산해전 10차 접전 100여척 격파, 아군 정운 장군 전사. 이후 명량해전,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23전 23승을 거두는 동안 적군의 피해에 비해 아군의 손실은 아주 미미한 대승이었고, 전쟁보다는 휴전 시에 역병으로 잃은 군인이 더 많았다. 이것은 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손자병법을 실행하여 얻어낸 결과이다.  
 
9. 명나라 도독 진린의 감동
 명나라 도독 진린이 왜란이 끝나고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 하늘을 날줄 삼고 땅을 씨줄 삼아 천하를 경륜할 인재요, 무너진 하늘을 메울 만큼 공이 크다"하였으니, 공동작전에서 얻은 전과를 나누어준 배려, 왜군의 퇴로를 열어주려 했던 자신을 설득시켜 철수하는 왜적을 섬멸한 뚝심,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준 헌신도 고마웠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그 출중한 인격에 감동한 추앙이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진린 도독의 청산도 공적비에 "李舜臣絶命夜大星隕海"라는 말이 새겨있는데, 여기서 따온 "대성운해(大星殞海) 큰 별 바다에 지다"를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써주시니 이락사 현판으로 걸려 있다. 
 
10. 무등병에서 영의정까지
 장군께서 전사하자 우의정에 증직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6년 뒤 좌의정을 추증하고, 덕풍부원군에 봉했으며, 선무일등공신에 책정되었다. 그러나 충무공 시호를 받은 것은 전사 후 65년이 지난 인조 21년이었으며, 영의정을 추증한 것은 정조 17년(1793)의 일이었다. 같은 임란 때 진주성전투 단 한 번의 공을 세운 김시민에게 충무공과 영의정을 추증한 것은 1711년이었으니 영의정 추증은 23전 23승의 이순신 장군이 82년이나 늦었다. 이것은 생존 시에도 당쟁의 제물이 되어 파직과 백의종군의 수모를 당했거니와 사후에도 반대파들의 견제가 심했던 증거로 보인다. 
 장군은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여 계급이 없는 병졸이었고, 정조 때에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니 중간에 강등과 파직을 거듭한 끝에 당시의 18계단 관직을 다 뛰어오른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폭넓은 관직 경험자이시다. 
 정조는 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으며, 묘소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왕이 신하의 비문을 지은 것은 오직 여기뿐이라 한다. 
 * 조선시대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분은 조영무, 남이, 이순신, 김시민, 이준, 김응하, 이수일, 김인후, 정충신 등 총 아홉 분이다. 
 
11. 유학과 병서를 통달한 지성
 공은 문과를 공부하다가 22세에 이르러 무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문과 공부를 많이 한데다가 무과 공부인 병서까지 통달하였으니 문무를 두루 갖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난중일기의 문장과 글씨에 공의 학식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몇 가지만 보자.
 - 한시를 정확하게 쓸 줄 알았고, 그 치열한 전쟁 중에서도 틈틈이 한시를 쓰거나 타인과 주고받은 걸 보면 어떤 문신을 능가한다.  
 - `송나라 역사를 읽고`라는 시가 있다. 장문이라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공의 글 중에서 가장 명문으로 손꼽힌다. 
 - 명량해전 출전훈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중국 전국시대 오기(吳起)가 쓴 오자병법(吳子兵法) 치병편(治兵篇)에 나오는 말이다.
 - 특히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써서 국보 제76호가 되었고, 세계기록유산(213. 6. 18. 등재)이 되었으니 어느 문집, 어느 저서인들 이에 따를까?
 - 공에 관한 모든 기록을 관통하는 맥은 승리가 공의 전부가 아니라 공의 정치가 모두 맹자(孟子)에 닿아있고, 공의 삶이 모두 중용(中庸)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12. 영원히 살아계실 불멸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몇 위나 될까? 거북선은 전국에 몇 척이나 될까? 기리는 사당과 사적지는 얼마나 될까? 관련 일을 하는 일자리는 몇 개나 될까? 관련 책은 몇 종이며 논문은 몇 편이나 될까? 영화나 예술작품은 얼마나 될까? 이런 것들을 다 헤아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만하다. 난중일기가 국보가 되고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만 해도 그렇다. 겨레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등불이 될 것은 자명하다 아니하랴?!   
 
 필자는 1998년 정부투자기관에서 퇴직 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섭렵하였다.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보수동 헌책방에서 몇 권을 구입했으며, 2001년에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나왔을 때는 신문에 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간 기억이 난다. 그때는 두 분 위인들의 정성에 감복하여 그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났었다. 
 20년이 넘은 기억을 토대로 목차를 잡아서 정리해보았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란 말이 있다. 이충무공의 시구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는 그 분이 표출한 지성(至誠)의 일단이다.
 이 글을 쓰면서 중용(中庸)의 말씀들이 자꾸 떠올랐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지성(至誠)일 것을 다짐하는 오늘이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