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향교의 다채로운 문화유적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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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향교의 다채로운 문화유적 기행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5.15 11:45
  • 호수 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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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 김성철 남해향교 사무국장
김  성  철남해향교 사무국장
김 성 철
남해향교 사무국장

합천군 문화유적 기행(4월 24일)
 남해향교에서는 지난 2주간 경남 합천군과 전남 완도군에 걸쳐 3일간의 문화유적 기행을 실시했다. 충효교실의 일환으로 진행된 첫 번째 기행은 지난 4월 24일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지 답사로 시작됐다. 
 남명 선생이 태어난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는 그의 외가로, 다섯 살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 조언형이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서울로 이사를 갔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당대 영남유학의 두 봉우리로 추앙되고 있다. 
 남명 선생의 생가지에는 아주 넓은 터에 안채, 아래채, 사랑채가 복원되어 답사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남해향교 장의들과 문화관광해설사 등 남해군민들은 "임진왜란 승리의 양대 축이었던 이순신 장군과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의병들의 충정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뇌리에 떠올렸다.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는 남명 선생의 외손 사위이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은 남명의 수제자이다. 고령의 의병장 김면 역시 남명의 제자다. 곽재우 이후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7년 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었다.
 오후에 찾은 곳은 황강변에 자리잡은 함벽루였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의 글이 누각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암벽에는 `涵碧樓`(함벽루)라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함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으로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게 배치했다.
 그리고 일행은 의자왕이 윤충 장군을 보내 함락시킨 대야성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부인과 함께 항복한 후 자결했다. 남해향교 문화유적 기행팀은 초계향교를 마지막으로 답사한 후 해질녘에야 남해로 돌아왔다. 

완도군 문화유적 기행(5월 1~2일)
 완도군 유교문화유적 기행은 문화재청 공모사업인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 중 `유림과 함께 떠나자`라는 프로그램이다. 첫째 답사지는 묘당도유적으로 1598년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이 진을 친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이곳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와 남해 충렬사에서 모셔온 장군의 유해를 15일 정도 임시로 안치한 월송대가 있다. 완도 문화유적 기행의 목적은 이순신 장군과 서포 김만중과 대비되는 삶을 산 윤선도를 만나기 위함이다.
 첫날 답사단은 통일신라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을 설치한 장도(將島)로 향했다. 일행을 태운 전세버스의 예기치 않은 고장으로 일정이 차질이 빚어져 우암 송시열이 제주 유배길에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에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에 새겨 놓은 글쓴바위는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해질녘 도착한 펜션 옆 예송리 상록수림과 갯돌해변은 산책하기에는 일품이다. 
 다음날 오전 7시, 전북죽으로 아침 식사를 한 우리들은 오래 걷기 불편한 사람을 제외하고 보길도 윤선도원림 중 첫 번째로 나오는 세연정을 향해 1,5㎞ 정도를 걸었다. 하지만 9시부터 개방인 세연정의 문은 닫혀 있었다. 
 문화유적기행 일행은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 윤선도 선생이 제주도로 가다 풍랑을 만나 자리잡은 낙서재로 향했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51세부터 84세까지 34년 동안 머물렀던 집으로 1671년 그가 생을 마감한 장소이다. 낙서재 앞에는 거북바위, 뒤에는 소은병이라는 낭만 가득한 자연이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어 멋스러움을 더한다. 
 낙서재 오른쪽 아래 곡수당은 윤선도 선생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던 곳이다.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이 곳 인근에 이르러 곡수를 이루고 있기에 붙은 이름이다. 
 낙서재 정면 산자락에 지어진 동천석실(洞天石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석실 앞에는 낙서재와 연결하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셨다는 차바위가 남아 있다. 윤선도 선생은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윤선도 선생이 51세 때 처음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했는데,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윤선도 선생은 죽을 때까지 해남과 보길도를 왕복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을 중심으로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남해향교에서 운영하는 문화유적 답사기행은 올해에도 몇 차례 더 진행할 예정이다. 군민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으니 군민 여러분의 많은 참가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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