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대교 마지막 사진사, "남해대교 덕에 먹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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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마지막 사진사, "남해대교 덕에 먹고 살았지"
  • 김희준 기자
  • 승인 2023.06.19 13:52
  • 호수 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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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 마지막 사진사 │ 박용길 (1952년 출생)

남해대교에 얽힌 생생한 기억을 기록하고 보관하고자 관광진흥과 관광개발팀이 제작한 『남해대교에 얽힌 생애사 "나 대교다"』 200여 페이지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20대부터 30-40대 이상 파독 광부, 버스 기사를 비롯해 주변의 보통 사람들까지 남해대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인터뷰 14편 안에 진솔한 이야기와 추억이 살아있다. 이 인터뷰 가운데 남해대교 마지막 사진사로 활동한 박용길 어르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신혼여행, 수학여행으로 남해대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혼여행, 수학여행으로 남해대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매일 대교 왕복하며 사진찍어
 <전략> 그 때는 학생들 수학여행 오면 전부 여기로 왔고, 신혼여행도 오고, 신혼여행도 요즘이니깐 해외로 나가지. 그때는 해외 나가기도 어렵고 제주도 아니면 경주나 남해, 이쪽으로. 합천 해인사나 이쪽으로. 모텔에 단체 팀들 자고 가고. 그 당시에는 마을에 여관이 있었고 승일여관이라고. 저쪽에 여인숙이 하나 있었고 그 정도지.<중략> 내가 대교에 카메라 메고 나온 것은 75년부터 나왔고, 대교에 카메라 메고 사진사 하게 된 이유는 집안 형 되는 분이 김해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었어. 하고 있었고. 할게 없으면 내한테 온나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내가 김해로 갔지. 한 일년 가까이 있었지. 그렇게 있다가 거기서 사진기술을 배워 가꼬 다른 사진관에 한 달에 얼마씩 월급 받고 일했고. <중략> 그 당시에만 해도 남해대교가 동양 최초로 현수교로 만들어졌다 해가지고 연세 많은 분들은 "세 번을 걸어야 저승 가는 길이 편하다"는 전설이 있었어요. 그때는 하루에 대교를 걸어서 네번을 왔다 갔다 했었어. 지금은 문화해설사가 있어서 지역에 대해 안내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그때는 해설사가 없었거든. 손님들이 이 대교가 언제 생겼어요 물어보면 우리가 다 말해주고. "68년 5월에 착공해서 73년 6월 22일날 개통했습니다. 기둥 높이 60미터, 총 길이 660미터 총공사비 18억 2천 5백만원." 그 당시에 개통할 무렵에 인건비 해봐야 하루 오백 원. 잡부들 인건비가. 남해대교 글씨는 박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를 했고.

말 태워 사진을 찍으면 500원을 받았다고 한다.
말 태워 사진을 찍으면 500원을 받았다고 한다.

모든 게 아날로그였던 시절
 <중략>찍고 나서 영수증을 기록해 가지고 하나는 손님한테 주고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가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장부에다가 주소를 적어 놓고. 혹시 영수증이 분실되면 사진을 보낼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중으로 주소를 적어 놨지. 그래 가지고 현상을 해서 그 주소대로 발송을 하는 거지. <중략> 그 당시 흑백은 200원. 그 당시 우표 해봐야 등기로 하면은 30원인가 했고 우표로 하면 10원인가 됐고. 칼라는 그 당시에 500원-600원. 그 당시에 여객선이 다녔거든. 여객선이 170원, 버스비가 270원이던 시절이었어. 그 당시에 칼라가 귀했어요. 결혼식을 해도 거의 흑백으로 찍었어요. <중략> 그 당시에 초창기에는 하루에 벌이가 3-4만원이었고 칼라 사진 많이 찍고 할 때는 7-8만원. 괜찮았지. 호주머니 안에 동전 손님들 내주고 한다고 호주머니 안이 닳아져 가지고 빵구가 다 나고.
 
개통식 현장은 어땠을까
 하동, 남해 이쪽에서 대교 개통한다고 10만 이상 된 인파가 몰렸으니깐. 상상도 못했지. 대교 개통 테이프 끊고 사람들이 걸어가는데 차단을 시켰다니깐. 대교가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서니깐 흔들려 가지고 멀미를 할 정도로 흔들렸다니깐. 와이어 줄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하동 노량으로 나룻배로 건너 가지고 거기서 남해 노량으로 걸어왔어.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어마어마했어 사람이. <중략> 개통 3일 앞두고 여기 경비도 서봤거든요. 작업 차량 이외에는 구경할 거라고 일반 손님들이 전부 한번 걸어볼 거라고 오는 걸 막고. 주간 경비팀, 야간 경비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이쪽 저쪽 양쪽으로 경비를 서고 그랬어요.
 
마지막까지 사진사로 남은 이유
 내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보니깐 늦게까지 한 거지. 내가 말을 가지고 있었고. 카메라가 많이 보급되었는데 말 한 번 타고 사진 찍고 했지. 말 한 번 타서 사진찍는데 500원을 받았으니깐. 말 보러 일부러 오는 사람도 있고, 말은 내가 한 10년 관리를 했지. 남해대교 때문에 내가 이 마을에 살게 됐지. 남해대교 때문에 먹고 살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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