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계묘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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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묘년에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7.03 16:25
  • 호수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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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서관호 시조시인·칼럼니스트
서 관 호시조시인·칼럼니스트
서 관 호
시조시인·칼럼니스트

 1963년 계묘년은 사상 최대 봄장마가 져서 수확 철에 보리가 다 썩었던 해이다. 당시 국민의 70% 이상이 농민이었고 가을에 거둔 벼농사는 농비 제하고, 세금 내고, 융자금 갚고, 학비 주고, 볍씨 보관하고, 제수거리 남겨두고 나면 이듬해 봄부터는 양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날 때까지 배고픔을 겪어야 했기에 이 기간을 소위 `보릿고개`라고 했었다. 그 해의 배고픔으로 겪은 설움은 뼛속깊이 새겨져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여태까지 그해를 일러 `보리 썩던 해`라고 부른다. 도대체 어느 정도 긴 장마였는지는 기상청에 묻지 않고는 장마일수가 인터넷에도 나와 있지 않아서 저로서도 궁금하다. 다만 경험을 말한다면 4월 말부터 6월 말까지 두 달여 동안 단 한 나절도 햇살을 볼 수 없었을 만큼 끈질긴 장마였다. 보리가 패면서 서 있는 보리이삭에서 싹이 트고 뿌리가 허옇게 나기도 했으며 곧 시커멓게 썩어버렸다. 양식이 떨어진 집에서는 퉁퉁 불은 보리이삭을 끊어다가 솥에 불을 때고 바수어서 먹었고, 그나마 양이 적어서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일찍 수확해서 처마 밑에 들여놓은 보리도 모두 썩어서 집집마다 보리 썩는 냄새가 온 고을을 진동시켰다. 끼니마다 밥 동냥하는 사람이 문간에 줄을 섰고, 굶는 사람이 먹는 사람보다 많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산에서 칡이나 송기를 채취해서 먹고, 들에서 삘기나 찔레순, 바다에서 해초류는 물론 평소에 먹지 않던 억센 바닷말까지 뜯어다 먹기도 했다. 우리가 전세기 말에 겪은 IMF 외환위기, 최근의 코로나19와는 체급이 다른 수퍼 헤비급 재앙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정초부터 시작된 할머니의 환우는 지금 생각하면 위암 말기쯤으로 짐작되지만 당시로서는 환갑 연세인데도 노환으로 치부되었고, 한방과 일부 양약에 의존한 반년간의 투병 끝에 7월 열이틀 한여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저를 고등학교는 진주로 유학시켜주겠다고 하시던 할아버지의 계획은 흉년과 할머니 작고의 허들에 걸려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고등학교에 갈 생각조차 못하고 있으니까 선배들이 찾아와서 아버지께 저의 진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원서를 쓰라고 하셨다. 나의 중3의 기억은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다기보다는 태풍이 자주 올라오는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자라는 작은 동백나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도 수학여행을 갔던 것 같은데, 진주에 가서 7촌 아재가 사주신 짜장면을 처음 먹어봤고, 내년에 중학교에 갈 동생에게『외우기』책 한 세트를 사다준 것 말고는 사춘기의 감성에도 이렇다 할 기억조차 없다. 팔월에 있었던 추섬의 해양훈련만 파도에 일렁이는 휴지조각처럼 남아 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계묘년 우리 집에 딱 들어맞는 사자성어라고 생각한다. 음력 2월에는 일곱째인 막내 동생이 태어나서 어머니는 산고를 겪었고, 여태까지 여섯 손자는 모두 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그것이 안 되자 그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이던 여동생이 막내의 돌보미가 되었다. 봄에 막내 고모의 혼담이 있었는데 할머니 환우가 깊어지자 미루어졌고, 돌아가신 후 초겨울에야 혼사를 치렀다. 또한, 초봄에 할머니가 병석에 눕자 할아버지는 당신의 미래도 걱정이 되셨는지 묘소에 들어갈 석물을 준비하셨다. 석수장이를 모셔다가 뒷산의 화강암을 쪼았다. 비석과 여러 가지 조경석을 다 준비하는데 달포가 걸렸던 것 같다. 이것을 작은 것은 지게로 져서 나르고 큰 것은 목도로 운반하기까지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경비도 벼 몇 섬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 가정형편은 풍년농사라도 벼 30섬 남짓, 보리 40섬에 불과하였다. 그 정도를 가지고 어찌 보리가 깡그리 썩어버린 흉년에도 몇 가지 경조사를 당년에 치러낼 수 있었는지, 아무리 빚을 낸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의 고충이 이제야 헤아려진다. 
 이후 60년을 살면서 이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해는 없었다. 인생살이가 다 아침에는 생일잔치, 낮에는 결혼식이나 환갑잔치, 저녁에는 제사를 모신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운명이라고 하고 어쩌면 발달과업이라고는 하겠지만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정신적 수용의 한계도 있을 것이니 일도 일이거니와 독자로 자라나서 마마보이에 흡사했던 저의 선친은 그때 엄청난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아들이 고등학교를 가야하는지, 둘째가 중학교에 가야하는조차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열여섯 나이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겪는 동안 나에게는 어떤 인내력 같은 것이 생겼던 것 같다. 부딪치면 깨어질 수도 있지만 살아남을 수도 있기에 일단 부딪치는데 겁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이런 힘이 몸에 붙어서 살아온 그 후의 60년은 계묘년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올해 초 계묘년을 다시 맞으며 메모만 해두었던 제목을 오늘에야 꺼내서 글을 쓰면서 이 계묘년에 다시 지금껏 망설이고 망설이던 한 가지 일을 꼭 실천하고자 한다. 그것이 다시 계묘년의 장마가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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