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을병을 추모하며 … 이제 그만 내려와 편안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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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을병을 추모하며 … 이제 그만 내려와 편안히 쉬소서!
  • 남해타임즈
  • 승인 2023.07.06 15:44
  • 호수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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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백시종 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백  시  종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백 시 종
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1>  나는 읍에서 남면으로 가기 위해 이동 고갯길을 일 년에 몇 번씩 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저미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저 푸른 앵강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작은 비석 하나 세워 주소."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한맥문학 김진희 씨를 찾아와 유언을 남겼다는 정을병 선배 특유의 음성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째이고, 고향과 등을 지게 된 그 필화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언 30년이 훌쩍 지나간 해다.  
 
<2>  생각해보면 정을병만큼 고향 사랑에 지극했던 사람도 드문 것 같다. 내가 정을병 선배와 한 직장에서 일하게 된 것도 동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격적으로 나를 픽업해준 덕분이었다. 
 사무실이 남대문 시장 부근에 있었는데, 점심 무렵 찾아오는 손님 거의 반 이상은 고향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 방문객이 남해 사람인가 구분할 수 있었는가는 정을병 선배가 그 점심 자리 때마다 나를 초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타지에 살았으므로 남해 억양이 아니었는데도 "이 사람 말투는 그래도 오리지널 남해 사람 맞거마는."
 내 입장을 두둔해주곤 했다. 그의 직책은 홍보부장이었다. 그러니까 홍보부를 찾아오는 열에 일곱은 남해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람들은 홍보부를 `남해 향우부`로 바꿔 부를 정도였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는 고향 사람을 좋아했는데, 어쩌면 고향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덕분에 나도 수많은 남해 출신 문인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정치인, 종교인, 심지어 식물학자까지 골고루 만날 수 있었다.
 
<3>  유난히 자존감이 높았던 정을병 작가는 한때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고 버티면서도 무엇보다 고향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없는 상황을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1998년 남해를 공식 방문했는데, 한국소설가협회 소속 소설가 1백여 명과 함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문신수 작가가 당시 재선에 성공한 김두관 군수와의 만남을 주선했으며, 그 현장에 나도 참석했다.
 정을병은 고개 숙여 남해 군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속죄 발언과 더불어 당신의 실수를 거울삼아 남해 사랑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뜻을 김두관 군수에게 전했다.
 그날 오후 남해 유지들과의 만남도 이뤄졌지만, 그러나 그 필화사건을 주도했던 주요 인사들은 대거 불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용이야 어떻든 화해의 자리가 마련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반쪽 화해였고, 결국 용서받지 못했으며, 그 뒤로도 그는 일부 남해 사람과 척을 진 채, 고향 방문이 금지된 떠돌이 유배객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  나는 정을병 작가와 가깝게 교류하며 40년을 보냈다. 동향에다 문단에서도 선후배사이어서 사람들은 우리를 `바늘과 실`로 불렀다.
 그는 평소 호탕함을 강조했지만, 그래서 말투가 다소 거칠었지만, 내면으로는 그렇게 섬세하고 부드러울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술을 마시지 못했고 담배도 삼갔다. 그러면서도 술자리는 피하지 않았는데, 어느 술자리든 일단 참석했다하면 그 자리를 좌지우지했다. 술을 마시지 못했으므로 부도덕한 여자 문제 같은 실수도 하지 않았고, 돈 문제와 얽힌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문인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도 그 모진 고문과 협박을 이겨내고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무죄`를 이끌어낸 `강단`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5>  79권의 기록적인 작품을 남길 정도로 부지런했으면서도, 정을병은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작가다.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을 몇 주일 앞두고 일찍 사망한 외동아들과 뒤이어 그의 배우자까지 떠나보내고, 그 자신도 간암 3기인 줄 알면서도 치료를 거부하고, 유일한 피붙이인 딸에게 `내 죽음을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75세로 세상을 하직한 그가 왜, 앵강바다가 보이는 고향마을 언덕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고 애절한 유언을 남겼을까.
 나는 이동 고개를 지나며, 신전 숲과 앵강바다가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정을병 혼령이 고향 땅에 내려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인근 허공을 갈매기처럼 떠도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하곤 한다.
 
 정 선배님,
 이제 그만 내려와 편안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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