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당에서의 추억, 내 삶의 큰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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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당에서의 추억, 내 삶의 큰 원동력
  • 하혜경 서울주재기자
  • 승인 2023.08.18 10:51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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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우인터뷰 │ 국회 국토교통위 장지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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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 만큼 국가와 국익위해 기여하는 공직 큰 매력

 사람의 운명은 어떤 부모에게 태어났는가 보다 어떤 도시에서 태어나는가가 더 많은 것을 좌우한다. 성장과정에서 뇌에 아로새겨진 정서는 같은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을 묶어주는 강한 연결고리다. 같은 바다를 보며 계절의 변화가 담긴 같은 풍경을 보고 자란 남해인들은 남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얼마 전 국회 국토교통위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은 이동 난음마을 출신 장지원 향우(48세).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정서를 발견해 더욱 반갑다. 국토교통위원회 장지원 향우의 삶과 고향이야기를 전한다.
 입법고시를 통과해 국회 사무처에서 근무하던 장 향우는 최근 법학박사학위도 받았다. 다음은 장향우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먼저 공직에 들어오신 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셔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공부를 지속하시는 이유와 박사학위를 받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A. 법학박사로서 세부전공은 헌법입니다. 국회 공직자의 핵심역할 중 하나는 법을 개정하는 것이므로 법 중의 법인 헌법을 공부했습니다. 2017년 입법심의관(국장)으로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 참여하여 헌법개정 업무에 매진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 겨우 한 발을 내딛은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수 있도록 업무적으로는 대한민국의 헌법개정에, 학문적으로는 헌법학의 발전에 미력하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국회 국토교통위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으셨어요 전문위원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A. 국회법상 전문위원은 법률안과 예산안 등에 대한 검토보고를 통해 그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상임위원회에서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입니다. 
 특히, 국토교통위원회는 국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법률과 사업규모가 막대한 예산을 다루는 곳인 만큼 많이 부담되지만, 그만큼 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최연소로 입법고시를 패스하셨더라구요. 공직자가 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셨나요?
A. 제가 94학번으로 수능 첫 세대이자 서울 주요대학에 가려면 본고사를 봐야하는 첫 세대였습니다. 그 당시 남해고 졸업생 중 본고사를 치른 학생이 저 한명일 정도로 우리 남해와 같은 시골학생들이 이러한 대입제도의 급변으로 많은 손해를 봐야 했습니다. 실례로, 읍내의 서점에 본고사 문제집이 없어서 대구에 사시는 고모님께 부탁드려 문제지를 사 보아야만 했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동일한 출발선에서 다 같이 새로 시작하는 고시를 통해 서울사람들과 경쟁해 이겨보고 싶다는 마음에 고시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치기어린 마음에 이러한 개인적 계기로 고시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를 하면서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국가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공직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힘들기보다는 즐겁게 그리고 원 없이 실컷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시 중에서 입법고시가 경쟁률이 제일 높은데도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지 않나 합니다. 
 
Q. 공직생활을 하면서 어떤 공직자가 되어야겠다는 나름의 공직관이 있으신지요?
A. 냉철한 머리 그러나 따뜻한 가슴을 가진 공직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국회의 특성상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또한 만나야 하는 게 일인데, 업무적으로는 냉철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따뜻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습니다.
 
Q. 비자당 있는 곳이 고향집이라고 들었습니다. 비자당에 얽힌 추억이 있으실까요?
A. 비자당은 저희 집 포함 다섯 집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해 내에서도 작디작은 마을입니다. 그래도 없는 게 없었습니다. 찌그러진 냄비를 들고 고물상집에 가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엿을 바꿔 먹을 수 있었고, 지역 내 최고 엘리트(?)이신 이장님 집에 가면 신문을 맘껏 볼 수 있었습니다. 만물상집에 가면 톱이나 우산 등 아무 물건이나 척척 고쳐내는 이웃집 할아버님이 계셨고, 옆집에는 저의 구슬치기 라이벌인 동생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싫증나면 뒷산인 비자당산의 큰 비렁의 맨 꼭대기에 앉아 하염없이 저 멀리 푸른 남해바다를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어엿한 배산임수의 지형에 위치하여, 해 지는 저녁이면 아궁이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비자당에서의 모든 삶이 저한테는 추억입니다.
 
Q. 고향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이나 고향을 지키고 있는 고향분들에게 평소에 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 주제와 상관없이 말씀해 주세요.
A. 우리 남해인들의 몸과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 남해를 지켜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외지에 사는 저희들도 남해인으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남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행여 만나 뵙게 되면 통성명 뭐든 다 필요없이, "남해사람입니다" 이 한마디만 해주시면 언제든지 반갑게 인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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