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기념사업회 남해와 하동·산청 동학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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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기념사업회 남해와 하동·산청 동학의 길을 걷다
  • 한중봉 기자
  • 승인 2023.09.18 10:00
  • 호수 8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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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봉 기자의 동학의 길 순례 동행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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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군민 35명 참가, 최근 높아진 남해 동학 관심 반증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행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동학은 민주주의의 불꽃" … 산청 주민의 목소리 귓가에 생생
여장협 접주 묘소 복원, 유적지 입간판 설치 등 과제 언급돼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김환용, 남해동학사업회)가 남해와 하동, 산청군에 남아 있는 동학혁명군의 발자취를 쫓았다.
 지난 9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출발한 동학의 길 순례 차량에 탑승한 인원은 모두 35명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회원과 군민 35명이 동참했다는 것은 최근 남해지역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말해줬다. 

지난 9일 동학의 길 순례단이 임진성을 걷고 있다.
지난 9일 동학의 길 순례단이 임진성을 걷고 있다.

선구에서 임진성까지
 동학 유적 순례단의 첫 행보지는 남해에 처음 동학을 유입한 것으로 알려진 남면 선구 구정(龜汀) 김성재 선생의 효행비와 생가였다.
 우암 김명진 전 천도교 교령의 아버지인 김성재 선생은 진주에서 생활하던 1891년 동학에 입도해 선구 지역에 동학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순례단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서상항으로 남해에 들어온 영호동학군이 머문 임진성으로 향했다. 이곳은 영호동학군으로 활동했던 서면 서상마을 박용필 대정이 여수의 동학군과 남해읍성을 점령할 것을 모의한 곳으로 알려졌다. 임진성에서 숙영한 영호동학군과 서면, 남면, 삼동면의 동학군이 남면 죽전마을 입구에 집결해 상가리-대정리를 거쳐 평현리 야촌마을에서 정용태 접주 부대와 합세해 남해읍성을 공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지난 9일 동학의 길 순례를 떠났다. 이번 순례는 기념사업회 회원과 군민 35명이 참가해 지역 동학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반영했다. 사진은 임진성 앞이다.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지난 9일 동학의 길 순례를 떠났다. 이번 순례는 기념사업회 회원과 군민 35명이 참가해 지역 동학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반영했다. 사진은 임진성 앞이다.

서상을 거쳐 야촌으로
 순례단이 세 번째로 향한 곳은 서면 서상마을 박용필 대정의 생가였다. 대정(大正)은 동학의 육임제 중 하나의 직책이며, 박용필은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대정으로 임명하는 도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성강현 교수는 "박용필 대정의 도첩은 남해 동학농민혁명의 존재를 밝혀주는 핵심적인 유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남해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을 높여주는 대표적인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어 순례단은 읍 야촌마을 정종태 접주의 생가로 향했다. 야촌마을은 정종태 접주와 이종목 대정이 살았으며, 동학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설천 진목 사람인 여장협 동학 남해 초대 접주도 야촌 동학도소에서 머물며 활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장협 접주가 하동으로 활동지를 옮긴 후 정종태 접주가 이종목 대정과 함께 활동하며 김화순 등에게 동학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촌마을은 1890년대 초 남해 동학의 중심으로 해석되고 있다.

순례단이 여장협 접주의 가묘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가묘는 세월을 못 이기고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상태여서 복원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순례단이 여장협 접주의 가묘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가묘는 세월을 못 이기고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상태여서 복원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려져 가는 가묘
 순례단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여장협 접주의 가묘였다. 설천 진목과 고사마을 중간 지점에 있는 여장협 접주의 가묘는 지난해에 비해 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여 접주의 후손인 여유범 씨에 따르면, 여 접주가 1894년 11월 11일 하동 고성산 전투에 참전해 숨졌으나, 시신을 찾지 못해 참나무를 대신 묻고 이곳에 가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여 접주가 돌아가신 후 부인 성산 이씨는 아들 화규, 낙규, 도규를 데리고 일가가 있는 거제로 이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여 접주의 가묘는 여성훈 씨, 여덕주 씨를 비롯한 집안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고 한다.

고성산 위령탑

하동 고성산과 산청 학살터
 하동 옥종면 고승당산 일대는 1894년 11월 11일(음력 10월 14일) 동학군과 일본군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다. 남해에서도 앞서 언급한 구정 김성재 선생, 여장협 접주, 정종태 접주 등 많은 동학군이 덕신마을에 사는 하씨 성을 가진 노인이 준비한 배를 타고 노량 바다를 건너 고성산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당시 고성산 일원에는 4~5천명에 이르는 서부경남 동학군들이 유진하고 있었으며, 500~6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례단은 격전지였던 고성산까지는 너무 멀어 이번 순례에서는 직접 가지 못하고 산 중턱에 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 앞 참배로 동학군의 넋을 기렸다. 안내를 맡은 성강현 교수는 "이 위령탑을 건립하는데 남해분들이 많은 참여를 했다"고 알렸다.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아 1994년 건립된 이 위령탑 비문은 남해출신 정암 고정훈 교령이 썼다. 

성강현 교수가 임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강현 교수가 임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학은 민주주의의 불꽃
 순례단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고성산 전투에서 패퇴한 동학혁명군 180여 명이 일본군의 급습으로 모두 전사한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 기장골 일대였다. 이곳은 현재 발굴 중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돼 기장골 입구 도로 위에서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하재호 회장과 이 마을 주민 정종대(81) 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조부로부터 전해들은 기장골 학살을 설명한 정종대 씨는 순례단에게 "동학은 민주주의의 불꽃이었다"라며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남면 선구 구정(龜汀) 김성재 선생의 효행비.
남면 선구 구정(龜汀) 김성재 선생의 효행비.

활동 평가와 과제
 이번 동학길 순례는 여러 과제를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지역 동학 유적지 안내 입간판 설치였다. 순례 참가자들은 "우리 남해에 이런 유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하루빨리 유적지 안내 입간판 설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하나 중요하게 제기된 문제는 여장협 접주 가묘 복원이었다. 여유범 씨에 따르면 여 접주의 가묘는 일반 묘소 규모로 조성됐으나 세월에 못 이겨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이와 관련 일부 참가자들은 "동학의 뜻을 기리려는 지역 주민들의 힘으로 여 접주 가묘 복원을 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며 이와 관련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남해동학사업회와 사람들
 2023년 남해와 하동·산청 동학의 길 순례를 이끈 김환용 이사장은 "오늘 우리의 순례가 남해와 서부경남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공부하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 있을 남해동학문화제 등 사업회의 활동에 군민들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 남해동학사업회는 오는 10월 21일(토) 남해문화센터에서 남해동학한마당 마당극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사람과 만물이 평등하고 존엄한 남해`를 지향하는 남해동학사업회 활동 또는 회원 가입 문의는 사업회 실무를 총괄하는 정효종(m.010-2834-2799) 사무국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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