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 `남해 동학` 한 주제에 집중
상태바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 `남해 동학` 한 주제에 집중
  • 한중봉 기자
  • 승인 2023.12.01 11:56
  • 호수 87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존 3~4가지 주제 훑어보기에서 올해는 `남해 동학` 한 주제 톺아보기
송봉구·성강현 교수 주제발표 맡아 정문열·권성계 토론자로 나서
청중들 남해유배문학관 대강당 메워, 최근 높아진 남해 동학 관심 반증

 남해문화원(원장 하미자) 지역사연구소(소장 박성석)가 `남해 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서`를 주제로 학술포럼을 열었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이하는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은 기존의 3~4가지 주제를 다룬 것에서 한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 진행됐다. 여러 주제를 다룰 경우 다양성은 장점이나, 깊이 있는 발표와 토론이 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올해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의 실무와 진행은 한관호 연구소 사무국장이 맡았다.

제5회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이 지난 24일 남해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에서 열렸다. `남해 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서`란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성강현(맨 왼쪽)·송봉구(왼쪽 두 번째)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고, 정문열(오른쪽 두 번째) 강명재 대표와 권성계(맨 오른쪽) 교사가 토론자로 나섰다. 좌장은 박성석(가운데) 소장이 맡았다.
제5회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 학술포럼이 지난 24일 남해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에서 열렸다. `남해 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서`란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성강현(맨 왼쪽)·송봉구(왼쪽 두 번째)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고, 정문열(오른쪽 두 번째) 강명재 대표와 권성계(맨 오른쪽) 교사가 토론자로 나섰다. 좌장은 박성석(가운데) 소장이 맡았다.

남해동학 관심 고취 계기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소가 올해 집중한 내용은 `남해 동학`이었고 주제는 `남해 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서`였다. 지역사연구소가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그동안 묻혀져 있던 `남해 동학`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지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지역사연구소의 이런 선택은 최근 지역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남해동학에 대한 관심을 한 층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제발표 내용
 학술포럼의 주제발표는 송봉구 영산대학교 심상교양학과 교수와 성강현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가 맡았다.
 송 교수는 `동학의 창도와 계승` 주제발표를 통해 △수운의 일생과 동학의 창도 △수운의 사상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아울러 정재모·하준천·이천운·김명진·고정훈 선생 등 남해의 동학·천도를 계승한 천도교인들을 소개했다.
 성 교수는 `남해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주제발표를 통해 "남해의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어 남해의 3·1 만세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남해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활동은 남해의 정신이 항일과 충절을 빛낸 역사적 사건"이라 평가하고 "우리 역사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동학의 가치를 품은 남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안내문, 시설물을 정비해 남해의 정신으로 꽃피울 수 있는 다양한 후속 사업의 진행이 요구된다"고 제안했다.
 
토론 내용
 정문열 인문학당 강명재 대표와 권성계 남해고 역사교사가 올해 학술포럼 토론자로 나섰다. 정 대표는 "동학농민혁명은 전제와 전조가 있었다"며 1962년 진주민란이 있었을 때 남해에서도 농민봉기가 있었고 그 이후 계속된 수탈 등으로 민중의 저항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조정의 살육과 탄압이 있었던 점을 거론했다. 정 대표는 "동학농민혁명의 주류는 거대한 사회비판 민중이었으며 조직력을 갖춘 동학이 합해져 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축이 당시 사회현상에 불만을 가진 민중세력이라 강조했다.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권성계 교사는 동학농민운동의 한계점으로 동학이 지역 농민군과의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을 꼽았다.
 권 교사는 "포접활동, 사회 운동을 통해 동학이 지역, 지역 주민과 연대해 종교적 기능과 함께 사회 변혁적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물론 조선 정부와 일본의 탄압이 동학이 종교적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지 못한 큰 원인으로 꼽지만 동학이 창도될 때의 그 정신과 실천력을 회복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력이 전국적 또는 지역 단위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대단히 아쉬움을 자아낸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했던 주체가 바로 동학농민군이었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