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증발하고 뼈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상처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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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증발하고 뼈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상처 입어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6.03 13:45
  • 호수 7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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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6화 │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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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맞아 잃을 뻔한 오른팔과 다리 수술 성공
다양한 전투경험 속 전쟁 트라우마 남아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제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날의 상처를 설명하고 있다.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가 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제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날의 상처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호 8면에 이어〉
 
 총 12주간 해병대 훈련을 마친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에게는 더 혹독한 자대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쏜살같이 지나간 이등병 생활을 뒤로 하고, 일만 하는 일병생활을 맞이한 안 유공자. 그의 기억에는 사격실력을 향상시켜준 `사격 훈련`과 박정희 대통령 시찰 준비로 인한 산악훈련만이 남아 있다.
 안 유공자는 "당시 사격 훈련을 나가면 2주 정도 기간이 걸렸는데, 각 소대나 분대별로 인원이 대표해서 참가해야 했다"며 "고참들이 내게 훈련을 미루는 바람에 몇 개월 동안 사격을 도맡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훈련장에 가면 조교나 교관들이 알아볼 정도가 됐는데, 당시 자대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반복해서 훈련에 참가해줘도 눈 감아줬다"며 "그래서 단순 소총수가 아니고 저격병까지 수행하는 실력에 이르렀다"며 이제는 기분 좋은 회상을 늘어놓았다.
 또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대 방문을 예고한 탓에, 또 시범훈련을 보여야 하는 탓에 포항 구룡포 내 산악훈련장은 함성이 끊일 날이 없었다. 쉽게 말해, 유격훈련인데 좀 더 격하고 실전에 가까운 훈련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6개월의 산악훈련을 마치고 일병생활도 마쳐갈 때쯤, 전군을 긴장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1·21 사태의 주범이자 현재는 목사인 김신조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급습한 것. 훈련시기와 1·21 사태 등 자대생활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해병대에서도 출동 대기를 하고 있었지만, 안 유공자의 소대는 대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월남 자원…다시 불효의 길을 걸어
"될 때까지 한다" 해병대 정신

 1·21 사태가 발생한 즈음은 해병대 3연대와 2여단의 월남파병 교체 시기와도 맞물렸다. 3연대 병사들은 훈련소를 막 수료한 상태였고, 당시 안 유공자가 속한 5연대에서는 자원해서 갈 수 있었는데, 자원 병사는 적었다고 한다.
 안 유공자는 "당시 선임 중에 월남에 갔다 온 사람도 많았다. 물론,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며 "어릴 때부터 내 뜻대로 살아온 나였기에, 기왕 군대에 왔으니 실제 전쟁에도 참여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한다`는 해병대 정신을 바탕으로 월남 파병에 자원하게 됐다"며 "당연히 장남 입장에서 가족들에게 얘기하면 속만 썩이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미 겪어봐서, 알리지 않고 파병 길에 올랐다"고 밝혔다.
 
밤새 물속 대기
 부산항에서 출발한 지 15일을 지나 다낭에 도착했다. 캄보디아와 맞닿은 국경인 호이안, 그곳이 안 유공자가 생활하게 될 베트남 자대였다. 
 자대에 도착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매복 작전을 위해 상병이 된 안 유공자를 포함해 총 1, 2조 13명이 투입됐다. 이미 베트콩의 포탄에 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분노와 긴장은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매복지로 이동하던 해질녘의 조용한 도로(다리). 먼저 매복한 베트콩들이 총격이 시작됐다. 총탄이 안 유공자의 헬맷을 스쳐갔다. 부상자가 발생했다.
 소대원들은 도로 외곽에 흩어져 은폐를 하면서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는데, "1중대 대대 매복대 아니냐"라는 소리에 안심하고 일어서 움직이자 다시 총성이 들렸다. 이후 곧바로 냇가로 숨어들었다. 
 안 유공자는 "우리 부대는 총 한 발 쏴보지도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살기로 각오를 다졌다"며 "수류탄 위주로 무장을 하고 총은 전부 분해해 냇가에 버렸다. 죽고 난 뒤 뺏기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웠다. 한국도 못 가고, 부모님, 친구들도 떠올랐다"며 당시 물속에서 대기하던 상황을 떠올렸다.
 10시간 정도 지났을까? 해가 어스름하게 뜨자 호이안 군청 쪽에서 군화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너 죽고 나 죽자." 양손에 든 수류탄은 이미 안전핀이 제거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안 유공자의 소대장과 중대원들이 별도로 수행하던 작전지에서 멀리 떨어진 호이안까지 달려온 것. 수류탄을 꽉 쥐고 틀대로 튼 양손을 소대원들이 펴주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호이안 군청 방어전
 총알 한 발 쏴보지 못하고 당했던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이안 군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안 유공자의 중대. 당시 베트남군 1개 중대, 미군 해병대 1개 소대, 육군 1개 소대가 각각 배치를 받았다.
 안 유공자는 "도로정찰을 나갔는데, 베트남 할아버지가 쪽지를 건네줬다"며 "`지금 월맹 정규군이 호이안에 와 있으니 빨리 피하라`는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안 유공자는 수류탄과 총알을 대거 준비했다. 침공을 미리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그날 밤 호이안 군청 주위 물가에서 첨벙첨벙 소리가 났고, 조명탄 지원을 받아 주위를 밝혔다. 시커먼 그림자들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월맹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군청 주위가 포위됐다. 곧바로 설치한 크레모아와 부비트랩을 전부 터트렸다. 수류탄도 계속 던지고 총도 원 없이 쐈다. 날이 밝자 월맹군의 시체들과 도망간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안 유공자의 중대는 피해가 없었다. 군청 방어 임무를 받은 연합군의 승리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안 유공자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안 유공자는 "현장에서는 마른 나뭇가지 소리가 나면 총알을 맞지 않은 것이고 반대로, 둔탁한 소리가 나면 신체 어딘가에 맞은 것"이라고 말했다.
 
전투 후 방심은 금물
 호이안 군청 방어전 승리 후 날이 밝자, 시가전을 준비하기 위해 1번 도로를 지나 다낭까지 빈집을 뒤지며 나섰다. 미군이 선봉, 뒤따라 다른 연합군들이 차례로 수색에 나섰다. 그 중 안 유공자의 소대가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다. 이미 수색을 마친 뒤 도로와 거리는 조용했고 방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안 유공자는 "누가 내 오른쪽 다리를 `퍽`하고 때리는데 순간 엎어졌다. 우리 소대는 또 흩어졌고 나와 부사수, 탄약수 총 3명이 기어서 빈집으로 들어갔다"며 "수류탄은 아닌 것 같고 폭탄을 맞은 것 같다.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빈집에서 후임들을 압박붕대로 지혈하면서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오른쪽 팔에는 뼈가 보였고, 오른쪽 허벅지는 생고기를 난도질한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어 "시간이 좀 지나니까 오른팔이 저려왔고 힘이 빠지면서 감각이 없어졌다"며 "팔에 살이 없는 걸 처음 봤기 때문에 어찌해야 될지를 몰랐다"고 밝혔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고, 안 유공자는 베트남 내 미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미군은 "병원선(3개월 동안 치료하며 쉬는 배)을 탈 것인지 내게 물었지만, 말도 안 통하고 신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한국병원으로 가겠다고 요청했다"며 "그렇게 퀴논으로 재차 후송됐다"고 말했다. 
 이후 안 유공자는 "다행히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고, 뼈도 다치지 않아 수술이 가능했다"며 "병원장은 내게 병원에서 바로 귀국하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답답해서 움직였다"고 밝혔다. "팔과 다리, 머리까지 모두 동료들에 의해 속박된 채 수술대에 올랐다"며 "신경을 만져야 하고 팔의 남은 신경과 살을 연결하는 수술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수술을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렇게, 퀴논 병원에서 안 유공자는 다음 행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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