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영, 격동의 세월을 넘어 남해에 정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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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 격동의 세월을 넘어 남해에 정착하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6.09 11:13
  • 호수 7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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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6화 │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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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부상 후 1년간 한국 자대서 생활
전역 후 광부 자원, 독일에서의 42년
낯선 남해에서 8년째 황혼기 보내

〈지난 호 10면에 이어〉
 
 퀴논 병원에서 70일을 보내면서 안준영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수차례 전투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큰 부상을 입었지만 전우들이 있고 소통도 잘 되는 중대로 복귀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른팔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무리, 당시 한국에서 온 선임하사의 권유를 받아 경비중대로 복귀하게 된 안 유공자. 경비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있으면서 전투나 작전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병력이 필요할 때 투입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였다.
 그곳에서 1~2개월 있으면서 몇몇 작전에 투입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몸을 쓰기에는 어려운 상태. 안 유공자는 "어차피 전투에 투입될 거면 원래 소대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월남에서의 마지막 임무는 여단본부에 있는 간부식당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병장으로 귀국, 그래도 남은 군생활
 1969년 2월 1여년의 월남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안 유공자. 그는 "죽지 않고 돌아왔구나. 한국 땅을 밟으니 실감이 났다"고 밝혔다. 곧바로 사단장에게 복귀 신고를 하고 보름간의 휴가를 마친 뒤 그가 복귀한 곳은 다름 아닌 최전방 백령도. 안 유공자에게 힘든 점은 최전방이 아니라, 병장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 월남을 다녀왔어도 안 유공자는 병장 중에서는 막내에 속했기 때문에 자대생활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선임하사에게 부탁해 연호리 초소, 두문진 초소를 거쳐 다시 연호리 초소에서 자대생활을 이어갔다. 1970년 2월 28일 그의 군생활 36개월 3일을 마친 날이다.
 
한국, 베트남, 한국, 그리고 독일
 서울 뚝섬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안 유공자에게는 당시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듯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안 유공자는 "6·25전쟁 때문에 피난 다니고 학교는 잘 다녔지만, 군대 다녀오고, 월남 갔다가 다시 한국에서 전역했다. 당시 일자리가 없어서 다들 난리였다"며 "직장생활을 해본 것도 아니고, 배운 기술이 있던 것도 아니기에 막막했다"고 회상했다.
 안 유공자는 "3월에 신문을 보니까 `독일 광부 견습생 모집`이라는 기사를 봤고, 곧바로 지원하게 됐다"며 "당시 실업자가 천지였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다. 아마 몇 백명 모집하는데 몇 만명이 지원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부모님은 독일행을 반대했지만, 장남으로서 책임도 있고, 군대까지 다녀온 마당에 아무 일을 안 하고 있는 건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4월 광부 견습생 시험을 통과하고 5월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계약기간은 3년. 그리고 독일어 교육과 반공교육, 기초소양교육을 마치고 삼척시 소재 도계광산에서 실습을 한 뒤 10월 28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0월 29일 일본에서 갈아탄 비행기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다.
 "위험하다.", "나가라.", "도망가라.", "들어와라." 등 광부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언어교육을 받고 투입된다.
 안 유공자는 "당시 80여명이 같이 투입됐는데, 보통 굴진과 운반, 채광하는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며 "그 중 4명이 기계를 고치는 수리기사 역할을 수행하게 됐는데 운 좋게 내가 걸렸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9일 안준영(왼쪽)·권윤선(오른쪽) 부부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달 19일 안준영(왼쪽)·권윤선(오른쪽) 부부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3년 계약은 곧 그녀와 함께…
 광부생활을 하던 도중 안 유공자의 친구가 결혼하는 날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됐다. 1947년 4월 15일 대구에서 태어난 권윤선 씨는 신부의 친구였고 간호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안 유공자는 신랑의 부탁을 받아 당시 본(서독의 수도)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권윤선 씨를 차에 태우고 결혼식장까지 함께 이동하면서 반하게 된다. 
 권윤선 씨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분위기가 여자 나이 23세가 넘으면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저는 당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며 "또 여행도 하고 싶었고, 자주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간호사 일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극구 반대로 남들 갈 때 못 갔지만, 1972년 4월 1일 독일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권윤선 씨는 안 유공자가 완전히 맘에 들지 않았던 탓인지, 안 유공자가 기숙사를 찾아가 벨을 눌려도 묵묵부답이었다. 배고프다는 핑계로 만남을 권했고, 어떤 날은 창문에 돌을 던지며 이름을 불러 끝내 만남을 이끌어낸 일화는 지금도 웃으면서 얘기한다. 안 유공자는 "어찌나 깍쟁이인지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친구의 결혼식으로 인해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슬하에 2남을 두고 독일에서 4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 가운데 안 유공자는 여러 사업에도 도전하며 성공도 해봤지만 실패도 맛봤다. 그 가운데 아내 권윤선 씨는 40년 넘게 간호사로서 집안을 묵묵히 뒷받침했다.
 독일에서 반려자도 만나고, 건장한 두 아들도 낳으며 안정화된 생활을 했지만, 안 유공자의 마음속에는 노후는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단, 아내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 근처에는 라인강이 흐르고, 대중교통·교육·문화시설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또 하나의 모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뜻을 수용해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독일마을에서 만난 사람 덕분에 화계마을로
 2012년 6월 12일, 한국에서 지내기 위해 귀국한 날짜다. 어디서 머무를지 고민하고 여러 지인을 통해 알아가던 찰나에, 휴가차 남해를 방문하게 됐다. 안 유공자가 광부생활을 하면서 만난 오랜 친구가 독일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만나자마자 남해자랑을 늘어놓았고, 집을 구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그 기간이 귀국하고 2~3주가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삼동면 봉화마을에 남해에서의 첫 집을 장만하게 됐다. 그러나 집주인의 귀향으로 다시 집을 구해야 했던 부부는 2014년 9월 이동면 화계마을에 둥지를 틀게 된다. 
 안 유공자는 "8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만족스럽다. 타지에서 남해로 온 동네 형님들도 만나고, 성당에 다니면서 보람찬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자연도 좋고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서 꿈꾸던 시골 전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적응력이 강한 권윤선 씨는 "문화원에도 나가고 색소폰도 배우고, 좋은 사람들과 노후생활을 즐기고 나름 만족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 유공자는 "두 아들이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군말 없이 허락해줬지만,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무엇보다 독일에서 평생을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해병대로서 월남전 참전 후 부상을 당했지만 생계를 위해 묵묵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던 안준영 유공자. 낯선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안 유공자. 서울이 아닌 이름도 몰랐던 남해에서의 생활도 8년째다. 이제는 아내 권윤선 씨와 함께 남해사람으로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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