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피난 길 이후 국방의 의무는 1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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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피난 길 이후 국방의 의무는 1의 원칙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6.30 10:15
  • 호수 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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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9화 방재윤 월남전 참전 유공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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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64기, 지옥에서 차별도 견디며 생존
지난 1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방재윤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재윤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사용했던 배지와 나침판을 기증했는데, 잠시 사진촬영을 위해 기증품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1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방재윤 월남전 참전 유공자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재윤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사용했던 배지와 나침판을 기증했는데, 잠시 사진촬영을 위해 기증품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남들보다 이른 학교 입학, 해병대 자원입대, 월남전 참전, 짜빈박전투에서 생존한 7인 중 1인,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방재윤(方在閏·77) 월남전 참전 유공자의 이야기다.
 
6·25 발발, 가족 흩어져 피난
 군대 제대 후 지금은 남해읍 선소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방재윤 유공자는 본래 가평군 가평읍 대곡마을 방태한·조정희 부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첫째 형과 둘째 형 그리고 본인, 넷째 남동생과, 다섯째·여섯째 여동생으로 구성된 6남매의 일원이다. 
 그가 5세가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은 흩어진 채 피난길에 올랐다. 
 방 유공자는 "폭탄이 막 떨어지니까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큰 형과 거의 거지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경기도 여주로 향했지"라며 "전쟁통에도 무당들이 활동하는 거야. 여주에 도착해서는 무당집에서 떡을 얻어먹고 지냈지"라고 설명했다. 
 얼마나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도가 익어갈 때쯤 가평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 유공자의 기억에 따르면 195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니, 앞에 설명한 일들은 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전방 지역이었던 가평은 이미 포탄 파편과 총알 자국만 방 유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현대사 사진이나 역사책에서 보던 미군에게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손을 뻗고 따라다니는 그 현장에 어린이였던 방 유공자도 있었다. 
 방 유공자는 "집이 없으니까 미군들이 준 건지 쓴 건지 상자를 이불삼아서 잤지. 아버지는 6·25전쟁에 지원해야 되니까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차출 당했지"라며 "할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내가 오고 난 다음에 얼마 뒤에 가평 집으로 와서 만났지"라고 회상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온 뒤 배고픔이 조금은 해결됐다.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기 전, 벼나 콩 등을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를 땅에 묻어 둔 것이었다. 항아리를 꺼내 보니 그대로 잡곡이 있었던 것. 그 덕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숲에 천막을 치고 간이 시설로 만들어졌다. 1951년 큰 형을 따라 가평국민학교(현 가평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방 유공자. 그는 "집에 어른들은 일하러 갔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니까 형 따라서 학교에 놀러갔지"라며 "계속 가는 김에 입학하고 싶다고 했고, 입학하게 됐어. 그래서 내 동창들은 나보다 전부 3~4세 많지"라고 설명했다.
 1952년 가평의 중학교 건물은 미군들이 세웠는데, 6·25전쟁에서 첫 전사자인 40사단의 케네스 카이사 하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가이사 중학교`가 가평중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가평중학교와 가평고등학교로 나뉜다. 전쟁과 사연이 깊은 학교를 차례로 졸업한 그이다.
 
19세 나이 이른 해병대 입대
 방 유공자는 고등학생으로서 또래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여느 유공자와 마찬가지로 "당시 교육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국방의 의무가 정말 중요하다고 배웠다. 머릿속에는 당연히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며 "그래서 기왕 의무를 해야 한다면 혹독하다고 소문난 해병대에 입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사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이른 자원입대는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졸업하자마자 방 유공자는 곧바로 입대원서를 넣었다. 당시 나이는 19세. 동창 3명과 함께 신체검사를 받으러 춘천병무청으로 향했다.
 방 유공자는 "심사관이 나는 나이가 적다고 입대할 수 없다고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동창들은 다 입대하는데 나만 집에 가려니 그럴 수 있나"라며 "마침 담배 가게가 보여서 아리랑 담배 5봉지를 사서 심사관한테 줬지. 그러면서 꼭 입대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분 하는 말이 `너는 요령이 됐다. 해병대로 보내줄게`라고 해서 입대하게 됐다"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1964년도 4월 5일 해군훈련소가 있는 진해시로 향한 방 유공자. 
 그는 "훈련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해병대 훈련소 가기 전에 입대 대기기간을 일주일 준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어"라며 "나는 이왕 온 건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텼지"라고 말했다. 이야기에는 많이 생략돼 있지만 당시 해병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훈련이 악독하고 지옥과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개병대 훈련 또는 인간개조 훈련 등으로 불린다. 
 방 유공자는 "다시 받으라면 무조건 도망가지"라며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농담도 던졌다.
 훈련소에서 3개월을 버티며 마지막 훈련 중 천자봉 정상까지 구보가 남았다. 이를 통과해야만 미군들이 먹는 영양식 해병대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을 수 있다. 국군건빵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크기도 3배나 컸다. 몸에 있는 기름기는 다 빠지고, 정신력 하나만 가지고 마지막 훈련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해병대 164기, 군번 9320555 방재윤이다.


월남으로 가기까지
 경기도 김포시에 소재한 해병대 제1여단에 자대 배치를 받게 된 방 유공자. 그의 병과는 보병, M1·M2를 다루는 소총수였고 최전방 지역인 임진강 작전지역에도 투입됐다. 
 방 유공자는 "훈련소보다 더한 곳이 자대였다. 셀 수 없이 많은 고참들의 눈치를 봐야하고, 그때는 또 까라면 까야 되는 군대였기 때문에 어떤 명령이라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며 "기수가 낮을수록 배고픔의 정도도 비례했다"고 설명했다. 일일이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부조리와 가혹행위 등이 많았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된다. 
 1965년도 하반기 어느 날 해병대 1사단이 있는 포항부대와 김포부대가 교대를 하게 됐다. 당시 방 유공자는 일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포항에 가는 것도 잠시, 방 유공자의 부대는 그대로 베트남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파월을 위한 실전훈련에 임하게 된다. 
 방 유공자는 "한 한달 정도 훈련을 받았는데, 먹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게 챙겨주더라고"라며 "근데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새벽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서 비상사태가 걸렸지. 밖을 보니까 45인승 군용 트럭이 연병장을 쫙 둘렀대? `아 이제 가는가 보구나` 싶었지"라고 말했다. 이어 "훈련생들은 비무장으로 트럭 뒤에 탔지. 그러니까 헌병 2명이 올라타더니 M1 소총 실탄을 장전하더라고. 도망가지 말라는 협박이었지"라며 "목적지는 포항역이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어"라고 설명했다.
 월남 파병을 가는 대부분 군인들이 그랬듯, 방 유공자의 부대도 수천명이 탑승할 수 있는 배를 탔고, 일주일 동안 바다를 건너 다낭항에 도착할 무렵, 해병대는 그냥 내려주지 않고 작은 배로 갈아타는 훈련을 통해 다낭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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