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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64기, 지옥에서 차별도 견디며 생존
남들보다 이른 학교 입학, 해병대 자원입대, 월남전 참전, 짜빈박전투에서 생존한 7인 중 1인,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방재윤(方在閏·77) 월남전 참전 유공자의 이야기다.
6·25 발발, 가족 흩어져 피난
군대 제대 후 지금은 남해읍 선소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방재윤 유공자는 본래 가평군 가평읍 대곡마을 방태한·조정희 부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첫째 형과 둘째 형 그리고 본인, 넷째 남동생과, 다섯째·여섯째 여동생으로 구성된 6남매의 일원이다.
그가 5세가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은 흩어진 채 피난길에 올랐다.
방 유공자는 "폭탄이 막 떨어지니까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큰 형과 거의 거지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경기도 여주로 향했지"라며 "전쟁통에도 무당들이 활동하는 거야. 여주에 도착해서는 무당집에서 떡을 얻어먹고 지냈지"라고 설명했다.
얼마나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도가 익어갈 때쯤 가평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 유공자의 기억에 따르면 195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니, 앞에 설명한 일들은 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전방 지역이었던 가평은 이미 포탄 파편과 총알 자국만 방 유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현대사 사진이나 역사책에서 보던 미군에게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손을 뻗고 따라다니는 그 현장에 어린이였던 방 유공자도 있었다.
방 유공자는 "집이 없으니까 미군들이 준 건지 쓴 건지 상자를 이불삼아서 잤지. 아버지는 6·25전쟁에 지원해야 되니까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차출 당했지"라며 "할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내가 오고 난 다음에 얼마 뒤에 가평 집으로 와서 만났지"라고 회상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온 뒤 배고픔이 조금은 해결됐다.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기 전, 벼나 콩 등을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를 땅에 묻어 둔 것이었다. 항아리를 꺼내 보니 그대로 잡곡이 있었던 것. 그 덕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숲에 천막을 치고 간이 시설로 만들어졌다. 1951년 큰 형을 따라 가평국민학교(현 가평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방 유공자. 그는 "집에 어른들은 일하러 갔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니까 형 따라서 학교에 놀러갔지"라며 "계속 가는 김에 입학하고 싶다고 했고, 입학하게 됐어. 그래서 내 동창들은 나보다 전부 3~4세 많지"라고 설명했다.
1952년 가평의 중학교 건물은 미군들이 세웠는데, 6·25전쟁에서 첫 전사자인 40사단의 케네스 카이사 하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가이사 중학교`가 가평중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가평중학교와 가평고등학교로 나뉜다. 전쟁과 사연이 깊은 학교를 차례로 졸업한 그이다.
19세 나이 이른 해병대 입대
방 유공자는 고등학생으로서 또래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여느 유공자와 마찬가지로 "당시 교육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국방의 의무가 정말 중요하다고 배웠다. 머릿속에는 당연히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며 "그래서 기왕 의무를 해야 한다면 혹독하다고 소문난 해병대에 입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사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이른 자원입대는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졸업하자마자 방 유공자는 곧바로 입대원서를 넣었다. 당시 나이는 19세. 동창 3명과 함께 신체검사를 받으러 춘천병무청으로 향했다.
방 유공자는 "심사관이 나는 나이가 적다고 입대할 수 없다고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동창들은 다 입대하는데 나만 집에 가려니 그럴 수 있나"라며 "마침 담배 가게가 보여서 아리랑 담배 5봉지를 사서 심사관한테 줬지. 그러면서 꼭 입대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분 하는 말이 `너는 요령이 됐다. 해병대로 보내줄게`라고 해서 입대하게 됐다"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1964년도 4월 5일 해군훈련소가 있는 진해시로 향한 방 유공자.
그는 "훈련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해병대 훈련소 가기 전에 입대 대기기간을 일주일 준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어"라며 "나는 이왕 온 건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텼지"라고 말했다. 이야기에는 많이 생략돼 있지만 당시 해병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훈련이 악독하고 지옥과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개병대 훈련 또는 인간개조 훈련 등으로 불린다.
방 유공자는 "다시 받으라면 무조건 도망가지"라며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농담도 던졌다.
훈련소에서 3개월을 버티며 마지막 훈련 중 천자봉 정상까지 구보가 남았다. 이를 통과해야만 미군들이 먹는 영양식 해병대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을 수 있다. 국군건빵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크기도 3배나 컸다. 몸에 있는 기름기는 다 빠지고, 정신력 하나만 가지고 마지막 훈련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해병대 164기, 군번 9320555 방재윤이다.
월남으로 가기까지
경기도 김포시에 소재한 해병대 제1여단에 자대 배치를 받게 된 방 유공자. 그의 병과는 보병, M1·M2를 다루는 소총수였고 최전방 지역인 임진강 작전지역에도 투입됐다.
방 유공자는 "훈련소보다 더한 곳이 자대였다. 셀 수 없이 많은 고참들의 눈치를 봐야하고, 그때는 또 까라면 까야 되는 군대였기 때문에 어떤 명령이라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며 "기수가 낮을수록 배고픔의 정도도 비례했다"고 설명했다. 일일이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부조리와 가혹행위 등이 많았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된다.
1965년도 하반기 어느 날 해병대 1사단이 있는 포항부대와 김포부대가 교대를 하게 됐다. 당시 방 유공자는 일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포항에 가는 것도 잠시, 방 유공자의 부대는 그대로 베트남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파월을 위한 실전훈련에 임하게 된다.
방 유공자는 "한 한달 정도 훈련을 받았는데, 먹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게 챙겨주더라고"라며 "근데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새벽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서 비상사태가 걸렸지. 밖을 보니까 45인승 군용 트럭이 연병장을 쫙 둘렀대? `아 이제 가는가 보구나` 싶었지"라고 말했다. 이어 "훈련생들은 비무장으로 트럭 뒤에 탔지. 그러니까 헌병 2명이 올라타더니 M1 소총 실탄을 장전하더라고. 도망가지 말라는 협박이었지"라며 "목적지는 포항역이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어"라고 설명했다.
월남 파병을 가는 대부분 군인들이 그랬듯, 방 유공자의 부대도 수천명이 탑승할 수 있는 배를 탔고, 일주일 동안 바다를 건너 다낭항에 도착할 무렵, 해병대는 그냥 내려주지 않고 작은 배로 갈아타는 훈련을 통해 다낭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