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GOP에서 월남으로 가기 위한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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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GOP에서 월남으로 가기 위한 진심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7.07 14:19
  • 호수 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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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0화 김일권 월남전 참전 유공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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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첫 월남전 강의 접해
지난달 24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김일권 월남전 참전 유공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일권 유공자가 흔적남기기 사업에 기증한 월남전 당시 생활했던 사진첩을 보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달 24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김일권 월남전 참전 유공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일권 유공자가 흔적남기기 사업에 기증한 월남전 당시 생활했던 사진첩을 보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부모님에게 월남 파병을 알리지 않고 입대한 김일권(金日權·76)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전쟁 생활을 마치고 부산항에 도착하자 생환했음을 실감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군 입대 후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포옹을 했다.
 50년이 지나도 그 당시로 돌아간 아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6·25 피난용 토굴에도 들어가
 창선면 동대마을 김영수·장소제 부부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일권 유공자는 본래 1946년 3월 16일생이지만, 당시 돌을 넘기고 죽는 아이들이 많아 1년 후인 1947년 3월 16일에 출생신고를 마쳤다. 유년시절 첫 기억은 초등학생 때 전기가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신기해하면서 전등불을 켜고 끄는 것 또한 엄격했다고 한다. 
 창선초·중·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한 창선 토박이인 김 유공자에게도 6·25전쟁의 기억은 선명하다. 
 김 유공자는 "큰집에 토굴을 하나 만들었었지.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북한군이 넘어오는데, 그때 가족들이 피신하는 용도로 사용했지"라며 "6·25전쟁 이후에는 농산물을 저장하고 유용하게 사용했었어"라고 회상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초등학생 시절. 그는 "미군들이 원조물품으로 분말 우유를 줬는데, 책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갖고 와서 먹었던 기억이 나네"라며 "고구마 빼데기를 갈아서 그때 말로 `개떡`으로 쪄서 우유랑 같이 먹으면 최고의 음식이었네"라고 말했다. 
월남전과의 이른 첫 만남
 김 유공자는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산에서 나무를 구해와 땔감으로 썼고, 삼천포 부둣가에 나무시장이 열리곤 했다. 
 고등학생 시절 월남전을 다녀온 첫 귀국 기수 군인들이 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그것이 김 유공자를 월남으로 이끈 작은 시작이었다고 기억한다. 1965년 2월 창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체검사를 하고 2년 뒤인 1969년 3월 29일 입대를 명받았다. 
 육군 논산훈련소로 가기 전, 수용연대(훈련소로 이동하기 전 2~3일 임시 대기하는 곳)를 거쳐 훈련을 마치고,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교육장에서 주특기 교육을 받았다. 그가 받은 보직은 lmg(light machine gun) 경기관총병이다. 군번은 11956155.
 김 유공자는 "훈련소 생활은 배고픔의 연속이었지"라며 "정량 배식으로는 부족했고, 오히려 동기가 아파서 못 먹는 상황이 생기면 야속하게도 우리가 더 먹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 많았어"라고 회상했다. 
 이후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했던 101보충대를 거쳐 경기도 연천군 소재 최전방 부대인 제20보병사단(결전부대)으로 60연대 본부로 자대배치를 받는다. 
 
끈질긴 설득 끝에 월남전 가다
 최전방 부대는 보통 6개월의 기간을 두고 훈련과 경계 근무를 번갈아가면서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김 유공자는 신병 생활 3개월 만에 GOP 근무를 하기 위해 연천군 신탄리로 자리를 옮기게 됐고, 그곳은 백마고지가 보이는 곳이었다.
 특히 GOP는 최전방인 만큼 추위와도 맞서 싸워야 하는 곳으로, 김 유공자는 "그곳의 겨울은 입김이 얼 정도로 추운 곳이었지. 나무를 패서 아궁이불을 때야 하는데, 남방한계선(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북쪽 2km, 남쪽 2km 지점에 그어진 선이고, 보통 GOP 경계병들이 근무하는 철책선이기도 함) 근처 한탄강 옆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두개골을 보기도 했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검은색 내지 회색으로 삭거나 바가지 모양도 있었고, 살면서 사람 뼈를 본 게 처음이었지"라며 "우리도 전쟁에 참전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싶었지"라고 말했다.
 당시 GOP부대의 일과는 단순하면서도 반복됐다. 한 사람이 12시간씩 호에 들어가서 경계를 서야 하고, 다른 부대원들은 다음 경계근무를 위해 자거나, 나무를 패거나, 불을 때는 그런 일상이 반복됐다.
 당시 김 유공자는 "GOP생활에 점점 지쳐갈 때쯤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 바로 월남전이었었지"라며 "고등학생 때 첫 기수를 보고 나도 군대에 가면 저런 멋진 군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있었거든"이라고 밝혔다. 이어 "죽더라도, 어차피 국가의 부름을 받아 왔는데 실제로 전쟁이 궁금하기도 했었어"라고 월남전을 가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GOP부대는 병력이 부족하고 또 정해진 기간이 있어 자원해도 윗선에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유공자는 "선임하사부터 중대장까지 월남전 자원을 요청했지만 계속 거절하더라고"라며 "그러나, 평소 갖고 있던 군대 생활에 대해 진심으로 계속해서 얘기하니까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어"라고 설명했다.
 원하는 바를 이뤄냈지만 안타깝게도, 김 유공자도 다른 유공자들처럼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고 월남을 향하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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