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 실현의 밑바탕 월남전 참전 유공자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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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실현의 밑바탕 월남전 참전 유공자들로부터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7.14 09:24
  • 호수 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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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0화 김일권 월남전 참전 유공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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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 30연대 신설 특공소대 `독수리소대` 일원
월남전·고엽제 피해 전우들 위해 11년간 회장직 맡아
김일권 회장이 고엽제 전우들을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일권 회장이 고엽제 전우들을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5월 3일 남해유배문학관 다목적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남해군지회 제3~5대 회장 이임식에서 김일권 회장이 경례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3일 남해유배문학관 다목적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남해군지회 제3~5대 회장 이임식에서 김일권 회장이 경례를 하고 있다.

월남전 참전 전까지
 GOP 생활 중 끈질긴 설득 끝에 월남전에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또한 다른 육군 병사들처럼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에 위치한 훈련소에서 5주간 교육을 받았다. 
 김일권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논산훈련소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고, 사람을 악에 받치도록 만들었지"라며 "실전 교육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이 한 목숨 바쳐도 미련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더라"라고 밝혔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1970년 3~4월, 베트남을 가기 위해 모두가 모이는 그 장소 부산항에 도착한 김 유공자. 그는 "부모님께 얘기하지 못한 게 눈물이 나더라. 참 찰나와 같았네"라며 눈물을 훔쳤다.
 잠시 뒤 "배가 떠날 때 많은 인파가 손을 흔들어주고 나랑 함께한 전우들이 손을 흔드는데 그때도 눈물이 나더라"라며 "그래도 후회는 안 했어. 그만큼 견문을 넓히고 자긍심이 있었거든"이라고 그때의 심정을 전했다.
 말없이 떠난 김 유공자의 소식은 라디오에서만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구매했고,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들의 첫 편지는 베트남에 도착해서 자대배치를 받고 난 뒤 받을 수 있었다.
 김 유공자는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당시 생사 여부를 단정 지을 수 없었거든. 어린 나이에 열정만 가득했었지"라고 말했다. 이어 "전역하고 난 뒤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라디오에서 언제 월남전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고 기다렸고, 어머니는 거의 매일 기도를 했다고 하셨어. 불효자가 따로 없었네"라고 고백했다.
 
월남 도착 신생 특공소대 선발
 베트남에 도착한 김 유공자는 나트랑 부두에서 내려 캄란 지역에 위치한 백마부대 30연대 소속으로 배정을 받았다. 
 부대에는 마침,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특공소대를 신설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수색대와 같이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소규모 부대다. 규모는 40명 정도였고 이름은 독수리소대로 불렸다고 한다. 면접과 별도의 체력, 훈련 과정을 통해 선발된 인원에 김일권이라는 이름도 포함됐다. 
 김 유공자는 "우리는 당시 대대작전 이상에 투입됐지"며 "보통 임무가 헬리콥터를 타고 산 정상 부근에 내려서 아래로 수색하는 역할을 했고, 또 필요한 곳에 물자를 운반해주고 임무가 많았어"라고 설명했다. 또한 "주로 투이호아 지역에 작전을 나갔는데, 우리는 마을에 수색작전을 나가게 되면 항상 미리 방송을 했어. 왜냐면, 민간인들이 있으니까"라며 "근데 보통 민가에는 노인들만 주로 있어서 교전도 많이 없었어"라고 회상했다. 
 
매복 작전 이동 중 교전 펼쳐져
 베트남에 온 지도 7~8개월이 지났을까? 당시 상병이던 김 유공자는 고참 축에 속했다. 
 월남전에서 국군이 가장 많이 한 작전이 `매복`이었는데 그날도 개활지로 매복 작전을 위해 수색을 하고 있었다. 당시 지역도 투이호아였다. 
 매복 지점을 확정짓고, 작전지로 향하는데 총성이 아닌 폭발음이 하나 둘씩 나기 시작했다. 수류탄과 크레모아가 터지기 시작한 것.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폭탄들이 계속 터졌다.
 김 유공자는 "우리도 이동 중이었고, 베트콩들도 이동 중이었지. 아마 양쪽 첨병들이 보고를 한 것 같은데, 수류탄을 막 집어 던지는 거야"라며 "나는 후미에 있어서 몰랐는데, 앞에서 전투가 펼쳐지니까 어쩌겠어. 같이 던져야지"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어 "들고 있는 수류탄이 많지 않으니 다들 미리 설치한 호에 숨어서 경계하면서 사격이 이어졌어"라며 "날이 새고 수색을 하니까 앓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가서 보니까 베트콩 한 명이 죽어 있었지"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아군의 피해는 없었고, 큰 교전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13개월의 월남전 생활
 독수리소대원으로서 임무를 하던 도중 귀국날짜가 가까워지면서 김 유공자는 일반 중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사진첩도 있고, 카메라도 살 수 있고 추억록도 작성하면서 나름의 문화생활도 알게 됐다고. 중대에서는 독수리소대에서 있었던 것만큼 작전에 많이 투입되지는 않았고, 총 13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베트남에서의 군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하게 된다.
 1971년 4월, 부산항에 내린 김 유공자. 한국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멀리서 보이는 낯익은 외형, 바로 아버지였다. 
 무사히 돌아와 반가운 아들과 겉으로는 티내지 않던 무뚝뚝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포옹했다. 
 짧은 휴가를 받고, 5개월의 군 생활이 남은 김 유공자의 자대는 제3보병사단으로 옮기게 됐다. 그곳에서도 GOP 생활을 하면서 9월 10일 제대를 명받고, 그리웠던 고향 창선면 동대마을로 돌아왔다. 
 
농협인으로서의 새 삶
 제대 후 곧바로 지금의 아내인 5살 연하 배정례(창선면 상신마을) 씨를 소개 받아 1971년 11월 30일 결혼식을 올리며 2남 2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이후에는 1972년부터 1999년까지 27년간 창선농협합에서 근무하고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창선농협 조합장을 역임했다.
 특히 김 유공자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남해군지회(초대회장 이정춘) 회장을 2011년부터 맡아 3~5대에 걸쳐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후 올해 2월 11일 지회장직에서 물러나서도, 고엽제 피해를 받은 전우들에 대한 복지 증진과 권리 향상에 노력해오고 있다.
 그는 월남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25전쟁을 겪고,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가 됐다.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 전쟁"이라며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사태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한다. 전쟁은 국방력과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유공자는 "그런 면에서 월남전 파병 용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의 기반 시설들이 설치되고, 가난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며 "자주국방을 위한 군대의 물품들과 무기들도 현대식으로 바꾸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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