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가 싫어 부러뜨린 바다 소년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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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가 싫어 부러뜨린 바다 소년의 성장기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10.11 12:02
  • 호수 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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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21화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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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사회생활에 나서다
선원 생활 중 기관장을 꿈꾸다

 버스라고 부르기에는 앞면은 트럭이고, 트럭이라 부르기에는 뒷면이 버스인 이 차의 이름은 `진중버스`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자 차량의 종류인데, 이 차는 군대에서 사용되는 차량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주로 공군의 산악부대에서 활용되는 산악버스다. 월남전에서도 몇 대 없는 진중버스가 운행됐는데 이를 운행했던 운전병이 바로 김병규(金炳圭·78) 월남전 참전유공자이다.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지난달 24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지난달 24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외동아들 일찍 가장되다
 1945년 3월 23일 상주면 두모마을에서 태어난 김 유공자는 김종순·하말례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외동아들에 공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꽤 있었던 김 유공자였지만,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유년시절 그의 재능은 그리 펼치지 못했다. 
 김 유공자는 "어린 시절 초가집에 살았는데 짚으로 만든 지붕이 집 전체를 다 덮지 못했어요"라며 "지붕의 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날개가 없었죠"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짚신을 신고 두모마을에서 초등학교 1~4학년까지는 전교생 60명 정도였던 양아분교를 다녔어요. 매일 등·하교 하면 짚신은 못 쓸 정도였으니까 매일 짚을 꼬아서 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죠"라고 말했다.  
 당시 상주면에서 분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5학년이 되는 해에는 모두 상주초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했다. 그래서 김 유공자도 5학년 때부터는 상주초등학교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한 학년당 두 반씩 해서 9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남자가 60명 정도, 여자가 30명 정도인 걸로 기억합니다"라며 "처음에는 동네별로 텃세도 있었지만 금방 친해졌던 추억이 새록새록 나네요"라고 회상했다.
 가난하지만 크게 부족함 없이 학교생활을 하던 와중 초등학교를 마칠 13세 무렵, 아버지의 위암 소식을 접하게 된 김 유공자. 그가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고 만다. 다행히 임종은 지킬 수 있었기에 인생에서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한다.
 김 유공자는 "아버지가 읍의 김의원에서 퇴원하고 평소 엎드려서 생활을 하셨는데, 어느 날 몸을 좀 눕혀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라며 "아마 본인의 운명을 직감하시고 그렇게 조치하신 것 같은데 그러고 얼마 안 가 돌아가셨죠"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어린 나이지만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도와 가장의 역할도 해야 했기에 김 유공자는 마음의 부담감과 동시에 청소년 시기의 방황도 함께 찾아오고 말았다. 
 
질풍노도의 시기
 가난이라는 벽을 넘지 못해 중학교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김 유공자. 본격적으로 금산에 지게를 지고 올라 나무를 패고, 여수항에서 두모항으로 건너 온 상인에게 나무를 팔고, 계절의 변화에 맞춰 어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하는 2년 동안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버린 김 유공자.
 그는 "지게를 지다가 골병이 들 거 같은 거예요. 도저히 농사는 저랑 안 맞다고 판단했고, 16세 때인가? 한날은 나무하러 안 갈 거라고, 농사 안 지을 거라고 하면서 지게를 부러뜨렸죠. 그러고는 여수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갔죠. 근데 여수에서 오던 경찰관한테 걸려서 두모항으로 쫓겨났죠. 그러고는 다시 탈출을 재시도 해서 결국 가출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했죠. 대못을 그리 박았으니…."
 16세 소년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였다. 
 
논밭 보다 바다가 체질
 가출을 하고 난 뒤 그의 선택은 어선을 타는 것. 당시 항구에서 어린 소년에게는 너무도 거칠었지만 가난과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 유공자는 "다행히 선장이 우리 마을사람이었고 아버지와 동갑 친구라 운이 좋았어요. 그렇게 저의 어선 생활이 시작됐답니다"라며 "농사보다 어선일이 재밌고 쉬웠어요. 바다가 체질이었나 봐요"라고 말하며 다시 미소를 찾았다.
 적은 돈을 받았지만 성실히 임했고, 흥미도 느낀 덕에 지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엔진 시동을 켜기 위해서는 장치를 돌려야 해서 힘이 많이 필요하고 지구력도 있어야 하는데, 어선 기관장이 연세가 많다 보니 저보고 해보라는 거예요"라며 "당시 저는 막내이고 청소년 성장기이니 힘도 셌죠. 제가 돌리니까 시동이 걸리는 거예요. 어선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때 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선원 생활에 잘 적응한 덕분에 두모항에 배가 들를 때, 어머니를 만나서도 당당하게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활비에 보태라고 돈도 갖다 드리고 나중에는 어머니에게도 인정을 받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김 유공자는 원양어선의 기관장을 꿈꾸게 된다. 
 
선원 생활도 잠시, 국가의 부름 받다
 어업인으로 성장하던 김 유공자도 국가의 의무를 지기 위한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1965년 그가 20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안 그래도 군대 가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막상 받았다고 하니까 오히려 잘됐다 싶었어요"라며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군대 안 가려고 노력했는데, 저는 가서 뭐라도 배워야겠다고 싶었거든요"라고 밝혔다.
 그렇게 1966년 11월 23일 겨울 논산훈련소로 입대해 29연대로 배속 받게 된다. 그가 앞서 밝혔듯이 뭔가를 배우겠다는 자세는 수송병, 운전병을 자원하게 만들었고 남들보다 기계를 잘 만지고 어선 경험을 인정받아 몇 안 되는 운전병에 합격하기에 이르렀다. 김 유공자는 논산훈련소에서 다시 신체검사와 면접을 마치고 4주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다음 운전교육대로 향하게 됐다.
 운전교육대로 가기 전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위치해 있던 제9보충대로 가게 된 김 유공자. 그를 포함해 보충대 있던 동기는 총 9명. 보충대의 한 간부는 "느그는 무슨 빽이 있었길래 여기 왔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후방지역이고 9보충대에서는 전투병보다는 지원병 등 비교적 특수임무를 준비하는 이들이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곳이었기에 보충대의 간부가 물어보는 건 당연한 행사였을 것이다. 
 동기 9명 중 2명은 정비병, 유일한 운전병이었던 김 유공자 며칠 머물렀던 9보충대에서 운전교육대로 자리를 옮겨 트럭으로 주·야간, 각종 길에서 총 9주 동안 운전교육을 받아 마침내 운전병으로 탄생하게 됐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군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게 만든 귀인이 나타난다.
 김 유공자는 "육촌 형이 경북 영천 탄약사령부에서 수송관(준위)을 하고 있었는데 9주 운전교육 기간 동안 그 형이 면회를 온 거예요"라며 "아마 그 덕분에 부산에서 자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모든 교육을 마친 그의 자대는 051탄약창으로 결정됐다.
 군번은 11681736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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