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진중버스` 운전병 … 대민지원 베트남 양민과 공조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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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진중버스` 운전병 … 대민지원 베트남 양민과 공조 펼쳐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10.13 12:00
  • 호수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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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21화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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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운전실력 덕에 1년 3개월 늦게 귀국
지프차부터 트럭, 버스까지 각종 차량 운행

<지난 호에 이어>
 
김신조 청와대 습격, 군 생활 늘어나
 운전병의 일과는 각 예하부대로 출동하기 위해 아침에 연료를 받아, 미리 운행 신청이 들어온 부대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주로 군수물자 수송이 주요 업무이다.
 김 유공자는 "주로 탄약을 수송했죠. 미국에서 수입된 탄약이 수영부두에 도착하면 우리 부대 탄약창고에 넣기도 하고, 해운대역 화물열차에도 실어서 다른 부대에 보내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차량을 정비해야 하는데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유행어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내무생활이 힘들었다는 김 유공자는  "차량이라는 고유의 공간에서 일과를 진행하다 보니 내무생활이 엄청 엄격했죠"라며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저녁마다 빠따(배트)를 맞아야 하루 일과가 마루리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라 당시에는 군 생활 기간이 2년 6개월이었는데, 월급을 감당하기에는 국가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라 병장 전역이 적었고 상병 전역이 많았던 시기였다. 상병 말을 목전에 두고 있던김 유공자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1968년 1월 21일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 김신조(현 김재현 목사)가 청와대를 습격한 것. 이 때문에 집으로 향하던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전역자들과 함께 현역병들은 전부 군 복무기간 6개월 연장이 확정됐다. 
 힘든 내무생활과 연장된 군 생활에 지쳐가던 와중에 어차피 국가의 부름에 응한 몸, 보다 뜻깊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월남전 참전이었다. 그러던 찰나, 당직사관이 "니 월남갈래?"라고 의향을 물었고 김 유공자는 잠깐의 고민을 마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김병규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출동 전 촬영한 사진이다.
김병규 유공자가 월남전 당시 출동 전 촬영한 사진이다.

백마부대가 아닌 비둘기부대가 되다
 육군이면 누구나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 거쳐가야 하는 곳인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훈련소. 보통 백마부대로 소속돼 파견 가는 경우가 많아 김 유공자도 백마부대에 배속됐는데, 3주간의 훈련을 마치자 비둘기부대 수송중대로 소속이 변경된 것. 비둘기부대는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공병, 경비, 통신, 군악, 수송 등 지원부대라고 분류하는 게 편하다. 그렇게 김 유공자는 1968년 4월 10일 베트남행 배를 타기 위해 부산항으로 발길을 옮겼고,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다.
 김 유공자는 "월남전에 참전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분명히 말릴 텐데, 고민은 했지만 가서 살아서 연락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출항할 때는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16세 때도 그렇고 월남에 참전할 때도 그렇고 어머니께는 죄송한 일이 많네요"라고 밝혔다. 
 베트남 나트낭에 도착한 김 유공자와 부대원들. 그들을 기다린 건 짐 싣는 수송기였다. 이들은 수송기 안에서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40분을 향해 도착한 곳은 베트남의 자대 디안이라는 지역. 1개 소대에는 24명, 3개 소대와 정비소대 2개가 수송중대에 배속돼 있었다. 그의 첫 임무는 물차를 운행하는 일이었다.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베트남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병규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베트남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유공자는 "디안 지역에 있는 부대에서는 지하수를 구하기 위해 땅을 파서 물을 길러야 했어요. 생활용수로 또 식수로 쓰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었죠"라며 "물을 길러서 통에 채우면 운반해 물탱크에 물을 채워주는 일을 2개월 정도 했죠"라고 설명했다.
 이때까지도 김 유공자는 무사고 모범운전병으로서 인정을 받아왔기에 이후 공병대대 대대장(계급 중령)의 지프차 운전병을 맡게 된다. 또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해 2개월을 보냈고, 당시 부대에 1대만 있던 "자유우방국가 국민은 누구나 탈 수 있다"라는 `진중버스`를 몰게 된다.
 앞의 진중버스 운전병이 과로로 인해 귀국을 하게 됐고, 차기 운전병으로는 각종 차량을 무사고로 운전한 경력을 인정받은 김 유공자가 선택받은 것이다. 
 디안~롱빈 30km, 롱빈(미군 보급창고)~사이공 100km, 사이공~탄손누트 20~30km, 캄보디아 방향 최전방 지역까지 40~50km. 이를 왕복하기 때문에 무려 4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한 셈이다. 50년이 넘었어도 기억하는 코스다.
 특히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적었고 대부분 비포장길과 숲길, 산길을 넘어야 했기에 또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차량이기 때문에 운전의 피로도는 훨씬 높았다. 
 김 유공자는 "베트콩을 제외하고는 베트남 사람들이나 여러 참전국의 군인, 민간인 등 누구나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타고 싶은 사람은 다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라며 "사실 낮에는 베트콩이라도 민간인처럼 하고 다녀서 이 사람이 민간인인지 베트콩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요"라고 설명했다.
 
 비둘기부대가 상징하는 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처럼, 김 유공자는 월남전에서 운전병이라는 특수한 보직도 있었지만, 어쨌든 군인에게도 민간인에게도 총 한 번 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비둘기부대, 건설지원단으로서 그는 대민지원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김 유공자는 "전쟁 때문에 생긴 피난민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도로도 닦고 길도 내주고, 군악대는 위문공연도 했었죠. 중대본부는 아이들한테 필요한 옷가지들도 나눠 줬어요"라며 "대신 베트콩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죠. 저는 교육받을 때 양민들에게 절대로 피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기에 양민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우리 부대가 많이 제공해줬어요. 만약, 공사나 지원 중에 재산 피해가 발생하면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다 보상해줬습니다"라고 밝혔다.
 
귀국 직전 위기의 순간 직면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편지

 6개월이 연장된 군 생활이었지만, 이미 베트남에서 6개월은 훌쩍 넘어버렸고 1년이 넘어가는 어느 날. 베트콩이 수류탄을 놓고 내린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진중버스에는 국군 경비 2명이 탑승하고 있어 수류탄을 일찍이 발견한 덕에 발로 찬 수류탄은 공중에서 터졌고 진중버스는 직진해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김 유공자는 "당시에 경비를 제외하고 사람이 3~4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만약 차에서 수류탄이 터졌으면 차량이 말을 안 들을 것이고, 또 폭파로 인해 탑승했던 사람들 모두가 인명사고로 사망했거나 크게 다쳤을 겁니다"라며 "그때 경비가 발로 차지 않고 제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거예요"라고 회상했다.
 아들이 예정보다 1년이 넘도록 귀국이 늦어지면서 김 유공자의 어머니는 하루하루 몸도 마음도 메말라가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김 유공자의 부대에 종종 도착했고, 김 유공자의 중대장도 더 이상 전역을 미룰 수 없었기에 김 유공자는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그때가 1970년 7월이다.
 김 유공자는 "어머니의 첫 편지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잊을 수가 없네요. 얘기를 안 하고 베트남에 왔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놀라셨겠어요"라며 "그렇게 야속하게 가느냐, 니가 그럴 줄은 몰랐다. 살아서 돌아와야 된다. 예상은 가겠지만 그런 편지를 볼 때마다 거듭 죄송하네요"라고 고백했다. 
 
다시 바다사나이로
 무사히 귀국한 김 유공자, 당시 한국에는 콜레라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육군 제39사단 옆 정자나무에서 전역증을 받고 고향으로 했다. 
 귀국박스에는 녹음기, 카메라, 싱가미싱 등 여러 물품들을 챙겨왔기에 아들이 살아돌아온 기쁨과 보기 힘든 물건들에 가족들은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 유공자는 30세가 되던 해에 중매로 9살 어린 미조면 조도마을 출신 이영심 씨를 만나 두 딸과 아들 3남매를 훌륭히 성장시켰다.
 또한, 전역 후 김 유공자는 운전병 경력을 살려 남흥여객에서 버스운전과 부산에서 택시기사 등을 했지만, 어릴 때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원양어선에 올랐다.
 김 유공자는 원양어선을 타고 5대양 6대주(현 7대주)를 다 가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뉴질랜드, 이란, 스페인, 포클랜드(영국령),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가나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국가를 다녔어요"라며 "이 기간 동안 기관장이 됐고 솔직히 돈도 많이 벌었죠"라고 말했다.
 여러 국가를 거치며 가정도 이뤘고, 평생 배를 타기는 어렵기 때문에 하선해서 부산에서 통발공장을 운영한 김 유공자. 1990년에 들어서 고향 남해로 돌아와 통발공장을 계속 운영했다. 초창기에는 남해읍에서 공장을 운영했지만 얼마 안 가 고현면 이어마을에 공장을 짓고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터를 잡게 된 것이다. 2015년부터 공장은 운영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김 유공자는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해서 배움에 대한 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식들은 나 같은 인생 안 살도록 최대한 지원해줬어요"라며 "다행히 두 녀석은 공무원을 하고 있고 한 명은 유치원 선생님도 했지요"라고 자식사랑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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