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판각 기능 갖춘 `남해대장도감`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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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판각 기능 갖춘 `남해대장도감` 복원해야
  • 한중봉 기자
  • 승인 2024.02.19 14:40
  • 호수 8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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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시대 고려대장경 관련 인터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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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고려대장경 남해 판각`을 둘러싼 문제가 최근 지역사회의 새로운 화제가 되고 있다.
시작은 지난해 10월 13일 남해 아난티 그랜드레지던스홀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이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영향력 있는 스님과 관련 학자들이 참석해 고려대장경 판각지 복원사업에 힘을 모았다.
남해군도 올해 군정 기조 중 하나로 고려대장경에 방점을 찍었다. 장충남 군수는 신년사를 통해 "남해군은 고려대장경의 판각지"임을 강조하며 지역의 문화 자산을 바탕으로 이를 관광명소로 제대로 만드는 데 군정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남해시대>는 고려대장경 남해 판각에 대한 관련한 이해를 높이고, 지역사회가 고려대장경을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할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느껴 <남해시대 고려대장경 관련 연속 인터뷰>를 기획했다. 
김정렬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장 회장과 인쇄 출판계에서 일하는 박석동 동경작업실 대표에 이어 김봉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을 지난 5일 남해읍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김 위원은 남해문화원 지역사연구위원,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지역사 연구와 고려대장경 판각지 복원에 관한 일에 집중해 오고 있다. 역은 책으로 <佛敎(불교)로 가는 길> <팔만대장경과 남해>가 있다.

김봉윤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을 지난 5일 남해읍 자택에서 만나 고려대장경 이야기를 나눴다. 김 부회장은
김봉윤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을 지난 5일 남해읍 자택에서 만나 고려대장경 이야기를 나눴다. 김 부회장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전체에서 판각 장소를 밝혀놓은 것이 딱 한 개 있다. 그곳이 남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께서는 오랫동안 고려대장경 연구를 해오셨습니다. 어떻게 고려대장경과 인연을 맺었고 어떤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 어렸을 때부터 객지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1990년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만든 곳이 남해라는 사실을 접하고 `대장경을 왜 하필 남해에서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남해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의 대사상가 혜심스님과 일연스님이 남해에서 활동한 것과 그 시기가 대장경을 만들던 때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진각국사 혜심과 보조국사 일연의 남해에서의 행적을 추적해 남해군이 판각지로 선택된 문화적 토대를 밝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대장경 조성사업의 핵심인물인 정안과 두 스님간의 남해에서의 교류 현장인 강월암과 정림사, 길상암에 관한 기록과 지역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조사해서 팔만대장경의 탄생지인 남해의 숨겨져 있는 실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장경 판각당시 고려는 불교국가였습니다. 최우 무신정권은 수선사를 중심으로 사원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수선사는 지금의 순천 송광사로 뱃길로 남해와 아주 가깝습니다. 수선사의 사주 진각국사 혜심은 남해에서 화방사를 중창하고 망운암을 창건했습니다. 그리고 정안이 남해에 창건한 강월암의 낙성식에 와서 남긴 시가 『진각국사어록』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1249년부터 1261년까지 12년간 남해 정림사와 길상암에 계셨습니다. 이 일연스님의 문도 12명이 대장경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대장경판에 글자를 새긴 부분 바깥에 대장경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있는데, 제가 이분들과 일연스님의 비문 뒷면에 나오는 제자들을 포함한 문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대조해서 12명을 찾아냈습니다.
 인류문화를 혁신한 목판인쇄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의 탄생지라는 역사의 현장에 살고있는 주민의 입장에서 우리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고 그 실체를 밝히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재미있게 뒹굴고 있습니다.
 
군민들과 향우분들이 알기 쉽도록 (고려)대장경을 설명한다면 =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제자들이 가르침을 결집해서 경전을 만듭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전을 편찬한 저자들의 국적은 인도 61명, 중국 41명, 우리나라가 7명입니다. 대부분이 인도와 중국에서 만든 경전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저술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의상의 『법계도기총수록』, 균여의 『십구장원통기』, 혜심의 『선문염송집』, 연선사의 『남명천화상송 증도가사실』, 수기의 『교정별록』, 대장도감의 『대장목록』입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만든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을 합니다. 번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인도와 중국의 스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출신도 한 분 계신데, 신라의 원측스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시간과 공간을 거쳐 대장경으로 탄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장경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데 대장경은 책입니다. 책을 만들기 위해 목판에 글을 새겼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은 705년경에 제작된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며, 또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은 1377년에 간행된 『직지』라고 불리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모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대한민국이 바로 출판인쇄문화의 성지인 것입니다.
 대장경(大藏經)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대는 `크다` 장은 `담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합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큰 그릇`입니다. 요즘 식으로는 `대용량 불경 데이터베이스 저장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도말로도 `띠삐따까`라고 하는데 경(교리)과 율(계율), 론(논문)을 담은 `세 개의 바구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다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해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 중 『종경록(宗鏡錄)』 권 제27 부함(富函), 제17장의 간기에 `정미세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丁未歲 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 開板)`이라고 유일하게 행정구역 명칭인 `남해`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내용을 쉽게 설명한다면 = 『종경록』은 중국 오대와 북송시대의 선승인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가 지은 1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책으로 일심(一心)에 대한 것과 교리공부와 참선수행이 하나로 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간기(刊記)는 대장경판의 각권의 맨 끝에 새겨진 경판의 간행기록을 말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책의 맨 앞이나 뒷면에 있는 발행일, 저자, 출판사 등이 적혀있는 판권과 같은 내용으로 『종경록』 27권에 나오는 `정미세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정미세`는 고려 고종 34년인 1247년으로 몽골의 4차 침략이 있던 해입니다. 1231년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이 그 이듬해인 1232년에 초조대장경을 불태웠습니다. 대장경이 불탄 뒤에 곧 다시 만들기 시작했는데 경판에 새겨놓은 간기를 보면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간 새겼으며, 1243년부터 1246년의 4년간 68%를 새겨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판각했습니다. 남해에서 『종경록』을 새긴 1247년은 판각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기입니다. 판각은 1248년에 끝내고 1252년까지 대장경 조성사업을 모두 마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은 팔만대장경 조성을 특별행정기구인 대장도감을 설치해서 왕명으로 국가가 주관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3면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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